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1-2
자유하지 못한 것은 매여서이다. 자신이 아는 것에 매였고, 모르는 것에 매였다. 매인 것을 모르니 돈이 자신을 매여도 모르고, 사는 데 따른 여러 형편과 사정에 매여도 모른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여기며 사는 데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말로 한 것을 행동이 따르지 못하면서 스스로는 괜찮은 줄 안다. 그 아는 것으로 자신을 매였다.
여기 자신들이 아는 율법에 매인 사람들이 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왔다. 여인은 음행하다 잡혔다고 하니 무엇에 매였었는지 알겠다. 이때는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이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보인다(2-3).
아침이다. 성전에서다. 그 시간과 장소는 빛이 거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신다(12). 곧 예수가 계신 곳이 밝히 생명의 빛을 더한다(12). 음행은 예나 지금이나 어둠 가운데서 행해진다. 죄와 모든 질병도 어두운 가운데서 진행된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선지자 이사야는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이 기도는 자유하지 못하고 매인 자들을 보고 드려졌다.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1).” 이는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 같이 저는 술에서 깰까 하여 술을 마신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이었다. 남을 속임으로 스스로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사는 자들은 어둠을 사랑한다. 자신의 양심을 한사코 외면하는 것이다.
이를 가까이 하며 우리는 자신을 근신한다.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이 천국을 사모한다. 정작 지옥을 사는 자들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둠을 떠나는 것은,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 23:4).” 이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8-11).”
이와 같은 말씀이 나를 향하고 계신 것을 알 때 매인 것을 풀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하시는 오늘 말씀 앞에서 아멘, 한다. 그렇듯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저들은 그렇게 아침에,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앞으로 음행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는 것으로 여인이 매였다 하고 자신은 자유롭다 한다. 그럴 때 주님은 말을 아끼시고 이르신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7-8).”
빛이 빛을 발할 때 어둠은 물러가듯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 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먼저 어떤 일 앞에서 말을 아끼는 것은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잠 2:11-12).” 늘 보면 말이 앞설 때 감당이 어렵다. 하여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14:15).” 지혜의 훈계는 일관되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15:28).”
예수님의 말없음과 행동하심은 절제된 언어로 명료하였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실 때 순간 빛이 저들의 어둠을 비추었고, 순간 어둠이 사라지듯 사람들도 물러갔다. 문득 바라는 것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자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3-15).” 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되새김은 그것으로 길이요, 답이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성경을 묻고 풀어 설명하는 2, 30분의 시간에 친구는 종종 ‘성경이 너무 어렵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쉬운 성경>을 찾고 <현대인의 성경>이니 <새번역성경>이니 하는 것을 찾는데 나는 별로 권하지 않는다. 물론 젖병을 물어야 할 때도 있고, 이를 떼고 이유식으로 해야 할 때가 있기는 하겠지만 성경은 일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곧 나는 저에게 오래 되씹고 우물거려 소여물 먹듯이 되새김질도 권하였다. 마치 ‘시가 어렵다’고 해서 산문이나 풀어놓은 해설로 대신하려 든다면 시를 읽는 즐거움은 묘연하다.
내가 아는 아무개는 박사학위도 가졌고 그 분야에서는 으뜸이 되었는데, 성경은 여전히 어렵다며 <쉬운 성경>을 읽는다. 이는 관심의 문제이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게임이 어렵다. 모든 제품 설명서가 어렵다. 주를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관심을 운운해야 한다면 더는 말해 뭘 할까? 그런 주님 앞에 간음하던 여자를 끌고 와 시험하려던 이들이 물러갔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하고 여자가 대답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하시며 돌려보내셨다(10-11).
그때 저 여자의 난처하고 민망함을 생각해본다. 내가 늘 주 앞에 설 때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송구함과 죄송함과 원통함에 대해서는 어찌 말로다 형용할 수가 없다. 은혜는 자신의 죄의 정도와 비례한다. 현재 나의 친구가 겪고 있는 난제다. 은혜는 알겠는데 자신의 죄에 대하여는 그리 심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은혜는 ‘알겠는 정도’에서 그만이지 눈물겹게 감사하게까지 여겨질 수가 없다. 감사도 하긴 하는데 그저 그 정도여서도 스스로는 난감하다. 내가 성령을 구하라 하는 말을 해주는 것은 나나 저나 우리로서는 거기까지다. 성경이 임하시기 전까지 예수님과 3년 반 동안 함께 하였던 제자들도 실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무엇으로는 세상 곧 나 자신을 굴복시킬 수 없다. 진리와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데 이를 알게 하시는 이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에 우리로서는 악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여기서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은 불씨가 귀하여서 이를 높이 샀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누구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한다는 일은 말을 멈추고 생각하기도 줄여서 주께 아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는데 말이 쉽지 내 속의 안달복달하는 마음은 둘째 치고 곁에서도 난리라, 이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오늘 예수님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으셨다. 여자에게 따져 묻지도 않으셨고, 다른 사람들과 변론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다소 생뚱맞은 말씀인데 앞서 모든 일의 전말이 이해가 된다. 빛 가운데 드러났음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면 더는 어디 사람이겠나? 그러므로 바울은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어쩌면 우린 너무 쉽게 판단하고 판단은 오해로 치달아서 저를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어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하물며 예수님도 그러하심은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여기서 우린 우리의 구별됨도 알게 된다. 우리들로 치면 우리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모든 매인 것은 풀린다. 우리가 자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들이 묻는다. “네가 누구냐?”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하실 때 저들은 깨닫지 못하고 우리는 알고 있다(25). 결국은 진리의 문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이를 알 때에 우리는 찬송하게 된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1-2).
무심히 찬송이 흥얼거려질 때, 운전을 하다 혹은 책을 보다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면서… 아,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 곧 오늘 우리의 자유는 예수 안에서이다. 이를 알고 난 뒤 베드로는 전하기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여기서 ‘선한 양심’은 사람으로서 모두 가진 양심과는 다르다. 우리의 양심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행’으로 증명된다.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대처할 때 중간에서 중재자가 되어야 할 때도 있다. 대신 욕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곳은 교회이고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질까 하여 사소한 일에서도 삼가 말을 아끼고 주께 아룀으로 견디는 것. 주를 의뢰함은 주가 날 위해 당하신 일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곧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
그리하여 오늘도 말씀 앞에 우선 앉히심을 감사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이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이 귀한, 불변의 진리 앞에서 나는 자유하다. 하여,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3-4).
하고 주께 기도하고 간구한다. 그럴 수 없어 발버둥치는 것이 복이다. 친구에게도 모르겠다, 어렵다, 하면서도 말씀을 따르고 성경을 읽고 새벽예배를 나가며 묵묵히 그리 행하는 그와 같은 행함으로 복이 있다고 축복하였다. 내가 무얼 한다 한들 선을 이루겠나? 오직 주를 바랄 뿐이어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은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7-8).” 그리하여,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5-6).
그리할 때에,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0) | 2024.01.21 |
---|---|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0) | 2024.01.20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0) | 2024.01.18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0) | 2024.01.17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0) | 2024.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