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전봉석 2024. 2. 5. 05:13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 4:18-20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9).

 

이를 붙들고 성령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이를 다시 시어(詩語)로 들으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2-24).

 

그리하여 우리는 연합한다. 한 마음으로 주를 바란다. 오늘 사도들이 사두개인들 앞에 붙들려 섰다. 저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 이 놀라운 역사는 서로가 하나되어 주를 알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서로 사는 지역이 다르고 섬기는 교회가 달라서 왕래가 드물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사이도 있지만, 저들은 주의 이름으로 헌금을 보낸다. 주께 구하여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한 길 가는 순례자로서 서로가 하나 된다. 이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나는 누구보다 이 은혜로 오늘에까지 왔다. 여러 번 간증한 바와 같이 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학부 때도 신대원 때도 나는 모든 학비를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감당하였다. 더 나아가 내가 그릇된 길로 행할 때도, 더는 구제할 길 없을 것 같은 때도 누군가의 눈물과 기도로 나는 오늘 여기에 있다. 우리 교회가 존속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때마다 서로가 놀라는 것은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는 사실이다. 오늘 7절과 같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고 누가 묻는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걸어갈 따름이다(10). 결국 나의 대답이 나로 담대하게 한다. 소위 나의 한 달 수입으로 치면 작년까지 50만원씩 아내에게 주다, 올해는 70만원씩 아내에게 준다. 오전에만 근무하는 아이가 십일조를 드리며, 월 100만원을 벌었다며 말하였다. 전에 같으면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의 신세를 어찌 생각할지 빤하지만 이젠 그것으로도 넘치는 은혜인 것을 안다. 또한 그리 모자람이 없다. 세무서에서 종교인과세 신고를 하라고 통보가 왔다. 이제는 얼마를 받는다고 적을 수 있어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3-24).”

 

말씀을 전하면서도 누가 예전 생활로 돌아가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리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누구에게 말씀을 전할 때 혹은 저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준비하지 않는다. 오늘 이처럼 묵상글을 쓸 때마다, 오늘은 무슨 내용으로 글을 쓸까? 미리 구상하거나 소재를 찾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의 날들이 즉흥적인 것 같으나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나의 이 모든 게 전우주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가 이루시는 것임을 안다. 자녀들에게 뭐라 훈계할 때도 나는 이제 사적으로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기도하며 두었다가 말씀을 전하면서 증거 한다. 친구에게 뭐라 권면해야 할 일도 이제 마음에 두었다가 말씀을 나눌 때에 말한다. 솔직히 나의 속내는 주께 넘기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을 주로 상대하다보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자격지심이나 위축되는 마음이 있다. 상대적으로 세상과 비교하며 살 때의 습성이 있어 공연히 주눅 들거나 기가 죽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헛된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주의 것이라는 데서 용기를 낸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예전 같으면 싫어하였을 이 말씀이 오늘은 가장 큰 힘이요, 용기요, 보증이다. 내가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고, 사나 죽으나 그렇다면 더 이상 뭐가 문제이겠나? 결국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더는 상대적으로 나를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대상이 없다. 그럴 때면 오히려 하나님이 어찌 나의 삶 속에서 함께 하셨는가를 생각한다. 도저히 남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은혜, 그 특혜에 대해 나는 또한 누구와 비교하지도 않는다. 저는 저의 하나님과 같이 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 더는 나의 자녀에게 또는 누구에게든지 강요하지 않는다.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전할 뿐이고 그게 지나면 내 몫이 아니다. 듣거나 말거나, 주가 다스리실 것이다. 저마다의 완고함에 나는 치를 떨면서도 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을 인정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이 담대함은 주의 이름에서 나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렇다면 설령 내가 망해도 망한 게 아니다. 졌다 해도 진 게 아니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이제 이 말씀이 주는 담대함을 알겠다. 쥐뿔도 없으면서, 실패한 것 같은 결과를 놓고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어떤 어려움, 혹은 마음의 짐을 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31:23-24).

 

곧 나의 진실은 주를 인정하는 데서 나의 나 됨을 내어놓고 주의 이름만을 붙드는 것, 오늘 사도들과 같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 이 분명하고 더는 변하지 않을 이름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큼, 오늘 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그러할 때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저는 나의 삶을 이루신다.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 내 곁에 두시는 누구와 누구, 또 새로운 누구에게도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너와 나는 ‘성전이 되어간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때론 기시감이 든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알 수 없는 나라, 내 장래의 일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오늘 사도들이 이처럼 담대하게 저들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설 수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처럼 예전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급해하며 자격지심에 눌려 시들하였을 마음인데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그러하여서 오늘이 어떠하든지 괜찮다. 나의 사정이 또는 교회가 내 곁의 아무개가, 어떤 일이, 그 무엇이라도 나는 이제 결과든지 과정이든지 이를 두고 앞서 걱정하지 않는다.

 

주가 내 편이시다! 돌아보니 그리 살아왔고 매순간이 그러하였다. 그때는 그 시절이 참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못 견딜 정도로 치욕스러운 가운데서 힘에 겨워한 것 같은데 돌아보니 모든 다 은혜였다.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너를 사랑하신다.’고 하였던 나의 부친의 말은 사실이었다. 엊그제 막냇동생과 무슨 이야기를 하다 언제 거기, 어릴 때 어려웠던 시절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지면서 ‘아, 하나님이 내 편이셨구나!’ 하고 놀라워했다. 내 곁의 누가 나환자촌에서 살아봤을까? 그때 거기, 그 소녀를 사랑했을까?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곧 중학생인데도 구구단도 못 외우고 철자법도 모르는 지진아였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었을 법한데, 우리 부모님은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까? 저들 또한 예수 이름으로, 주께 나를 맡겼을 뿐이었을 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경 66권의 정답은 이 한 구절에 다 담긴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모든 게 허구 같은, 아니 소설 같은 이야기다. ‘나 같은 인생’은 없다. 우리는 저마다 개별적이면서 계통적인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하나하나이면서 전부다. 나는 이제 내가 겪으며 살았을 나의 고단하였던 삶을 사랑한다. 하필 수술한 병원이 나혼자촌 한복판에 있었고, 하필 그 곳이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교회 곁에 있었다. 그곳의 소경 장로님들은 몇 달 같이 있었던 나와의 인연으로 감긴 눈으로 평생을 날 위해 기도하였다. 병원에서 돌아오자 의정부 저 안쪽 어디 하필 거기가 또 나환자촌의 교회였다니! 이 거짓말 같은 우연과 우연 속에서 만난 소녀와의 3년 여 시간이 나의 굳은 언어를 풀어주었고, 묶여 있던 사고의 세계를 확장하였다. 나의 첫사랑 그 소녀는 그 시절 주의 천사로 내 곁에 있었다.

 

이 치밀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동생이 듣기에도 소설 같았던지… 믿기지 않을,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 일을 어찌 사도들이라고 안 믿는 사두개인과 당시 유대교인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겠나?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또 하루를 마주하였을 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나는 이제 나의 이야기에서 감사함으로밖에 달리 드러낼 주제가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하여 사도들은 기도한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29-30).”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1, 5).

 

아,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6-7).

 

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