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15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시 119:81-82, 94
자신의 얼굴은 자신만 보지 못한다. 이를 보려면 거울을 통해야 하고 남의 말로 들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을 속이기 쉽다.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된다. 누가 왔을 때, 얼굴이 좋아졌네요! 하거나, 얼굴이 참 평안해보여요! 하는 소릴 들을 때면, 그런가? 하고 머쓱해서 얼굴을 쓰다듬는다. 얼굴은 생김새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과 전달의 의미다. 얼굴빛으로 건강을 살필 수도 있다고 하고 그의 삶이 어떠한지도 눈치 챌 수 있다.
오늘 말씀에 열두 사도들은 일곱 명을 택하여 집사로 세운다. 제자들이 많아져 서로 헌신하기를 매일하여 원망하는 자들도 생겼다. 이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2-4).” 서로의 역할과 그 사명을 분할하였다.
그때에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였다(5). 서로가 화목하기란 서로의 역할에 충실할 때이다. 가까울수록 블가근 불가원이라고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 무엇보다 서로 화목하는 일인데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그만큼 마음이 넘치거나 모자라면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이란 때로 너무 지나쳐서 집착에 가깝고 구속도 마다하지 않음으로 사랑해서 상처를 입거나 끼친다. 하여 늘 기도하기를 주님의 마음을 바라고 주의 사랑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구한다. 가족은 물론 교회에서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도 그렇다.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여 그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 얼굴에서부터다. 오늘 스데반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결국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하는 주의 마음은 때로 너무 어렵다. 하여 오늘 시인은,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시 119:81-82, 94).
곧 서로를 사랑함은 마음이 자꾸 쓰이는 일이다. 신경이 그리 향하여 예민하다. 저의 마음을 가늠하느라 온통 그 마음이 곤두선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데, 나는 너처럼 그렇게 예민하지 않다. 서로가 느끼는 예민함이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말에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랑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이 사실이다.
가끔 느끼지만 누구는 교회에 안 나간 지 꽤 됐다. 여러 사정과 이유가 있었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주일 예배 시간을 그리 귀히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주장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누구보다 확실히 믿는다고 말한다. 나는 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랑은 관심의 정도가 다르고 믿음은 막연하지 않다. 실제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보고 또 보고 싶고, 그 마음을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다. 이는 못 믿어서가 아니라 듣고 싶은 것이다. 표현하고 싶은 만큼 표현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때에 사랑하는 자의 얼굴은 빛이 난다. 생글생글하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얼굴을 숨길 수 없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난다. 여러 일로 마음을 쓰고 골치 아픈 일로 근심이 가득할 때도 주를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된다. 그때에 서로는 시비와 원망을 피한다. 오늘 사도들은 이를 위해 집사들을 세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그리하여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기쁜 마음으로 그리 앞선다.
요즘은 점심때마다 친구의 전화를 기다린다. 저가 성경을 묻고 궁금해하며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할 때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얼굴에 번진다. 마치 아이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면서 눈빛을 교환하고 나의 얼굴이 저절로 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 아이가 웃기라도 하면 그 웃음진 얼굴이 고스란히 내 얼굴로 변하여 중첩된다. 30여분 통화하는 시간이 금세 간다. 1시에 또 업무 시간이라 아쉬워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 축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친구라 서로 잘 아는 게 있는데 말씀을 나누고 이를 설명할 때, 나는 나대로 저는 저대로 그 시간이 귀하다. 그러면서 서로가 알고 지내던 서로의 허물과 성격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혹여 서로 서운했던 감정도 사라진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8-9).” 이를 서로가 본다. 스스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 손색이 없기를 은연중에 바란다. 주로 저는 질문을 하고 나는 답을 한다. 그 대답이 이해가 안 가거나 납득하기 어려울 때 우린 거침없이 우리의 옛생활을 들추고 부끄러움도 감수하며 정직해진다.
가끔 내가 누구들처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나다가도 이처럼 목회에 전념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시간을 다하는 게 일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할 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그저 묵묵히 나는 누가 다시 왔을 때 ‘여전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게 일이었다. 요즘은 부쩍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사라진 것도 그때부터다.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얼 하게 하실 때 그 쓰임에 합당하도록 ‘늘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어제도 누가 들러 새로 옮긴 곳을 보고 놀라다, 그대로네! 하는 말이 귀하게 들렸다. 그러다 무슨 말 끝에 얼굴이 참 편해 보여! 하는 말에서는 그런가? 하면서도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말씀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진다. 믿는 자로서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물론 늘 돈 문제, 건강 문제, 이런저런 생활의 여러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우릴 시달리게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도 오히려, 그리하여 말씀이 참 귀하다. 기도도 찬송도 누구를 향한 권면과 위로의 마음도 마음에서 나온다. 내가 누굴 임의로 부르거나 권할 수 없으나 그때에 주께서 그리 곁에 붙이시면 그 일에 충실하면 되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누굴 보면 늘 안타까운 것이 너무 바쁘다. 이 일 저 일 벌여놓은 게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다시 또 무엇에 마음이 기울어서 주객이 바뀐 삶을 살고 있는 게 불쌍할 정도이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하고 말하면 스스로 반박하기를 그럼 발전이 없다나? 그런 그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거둬내면 더는 나눌 게 없다. 말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보상태라 늘 투덜거리듯 성경은 어렵고 기도는 빌어대는 자신의 소원으로 엉망진창 야단법석인 것 같다. 누구와는 전화를 하다가도 두어 번은 다른 전화가 들어와서 기다려야 하고, 누구와는 진득하니 앉아 대화를 나눈 지가 오래다. 늘 보면 정신이 없는데 그 관심이 온통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해서이다.
말씀 없이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거짓이다. 주를 사랑한다면서 성도의 교제가 뒤로 미뤄지는 것은 위선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8-20).” 그러다 오랜만에 보면 어떤 일,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저가 평안을 되찾았다. 이 또한 불가해한 일이어서 마치 공식처럼 고난이 있기 전에는 주께 간절하지 못하다가 어느날 사람이 달라진 게 그 때문일 때 놀랍다. 그래서도 나는 나의 오늘이 적당히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게 때로는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한다. 사모함이란 주를 바람이 고난으로 인하여 위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일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막연하고 희미한 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이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10, 13).” 그러함에도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도 감출 수 없는, 얼굴의 역사는 드러남으로 숨길 수가 없다. 하여,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51).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우린 어렵고 힘들 때, 밤에 더욱 주의 이름을 기억한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55).
이것으로 “내 소유는 이것이니” 이로써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혹은 놀라운 일이 우리 신체 가운데 나만 볼 수 없는 나의 얼굴에서 드러난다(56, 57). 희한하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67, 71).
우린 마치 고난을 피하려 주를 믿고 사랑한다고 하나 생활에서의 질고가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나를 보고 같이 믿는 자들도 주를 찬송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4-75).
이 분명한 확신이 고난 정도는 천사의 얼굴로 받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6-77).
그리하여,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0) | 2024.02.09 |
---|---|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0) | 2024.02.08 |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0) | 2024.02.06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0) | 2024.02.05 |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0) | 2024.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