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전봉석 2024. 2. 3. 05:25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시 116:8-10

 

 

성경을 어렵다고 한다. 누군 그리 해석하는 게 말이 되나? 하고 묻는다. 서로 읽는 게 다르고 그때의 감정이나 느낌이 다르다. 왜 하나님은 성경을 어떤 공식이나 수학, 과학과 같이 증명 가능한 기호로 주지 않으셨을까? 난해하고 애매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다소 달리 해석할 수 있고, 서로 각기 달리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더하신 것일까? 성경을 풀어 설명하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저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다. 나는 들리는데 저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난감하다. 친구는 결국 주해 성경과 ‘어린이 성경’을 같이 놓고 읽는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런 열심이 귀하다고 생각하였다.

 

오늘 본문에 그 답이 있다. 서로의 지문이 각기 다르고 생김과 모양과 그 삶의 형태가 각기 다르듯 성경은 그에 따라 반응한다. 유동적으로 활동하신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이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은 성령의 것으로만 가능하다.

 

먼저는 순종할 때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 저들은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 120문도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1:15)” ‘한 곳’에 모였다. 하나로 마음을 모은 것이다. 일심(一心)이란 서로가 각기 다르나 그 바람은 하나여서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1:4).” 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5:32).” 그러할 때,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서로의 처지나 상황이 다르나 뜻은 하나여서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이에 오늘 우리는 하나로 모은다. 그 마음을 같이 한다. 더러 성경이 어렵다 하고, 투덜거리듯 번역을 탓하고 문장을 운운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귀를 기울인다. “그 때에” 저들은 “경건한” 사람들로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한 자리에 머물렀다(2:5). 저들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였고,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6, 8).” 하고 놀라워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왜 공식처럼 주어지지 않았는데, 증명 가능하고 명백한 표준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알겠다. 사복음서만 해도 각기 서로가 한 사람 예수를 동행하며 보고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바를 기록하는데도 각각 서로의 관점이나 기준에 따라 누구는 왕으로, 누구는 종으로 예수를 묘사하고 진술하였다. 오늘 여기 각기 모인 사람들이 서로 다르나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11).” 하고 외쳐 고백한다. 이에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고 의아해한다(12). 그러나 이들 속에 섞이지 못한 사람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3).”

 

모든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기 다른 문화와 언어로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그 의미 또한 다양한 게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란다. 그러나 때가 이르리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곧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9).” 그렇게 곧 가까이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계 14:16).”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어떤 공식이나 수학 풀이와 같이 하나가 아니어서 여러 해석이 출동한다. 이해가 다를 수 있다. 오늘 느끼는 것이 어제 느꼈던 것과 다를 수 있다. 같은 한 구절의 말씀을 놓고 그때는 이렇게 오늘은 저렇게 와 닿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나의 말에 친구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는 이과로 평생 설계도면을 그리며 살았다. 좌우측면과 그 수치가 일치해야 하는 것 같이 사고도 하나인 것을 바란다. 그러다 종종 저의 특징처럼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그러면서 투덜대는 저를 볼 때면 그 또한 좋은 때인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어제는 너무 피곤하다며 한숨이었다. 토요일은 물론 주일예배에 매일 새벽예배에 수요예배, 금요예배까지. 거기에 성경공부 교재도 풀어야 하고, 묵상일지도 써야 하는데…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럴 거면 하지마,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하고 있는 게 기특하고 신기하여서 그냥 두었다. 거기에 또 아이와 아이엄마까지 신경 쓰며 돌보라고 하니 친구의 투덜거림도 이해는 갔다. 그런 가운데 점심시간을 쪼개서 성경공부도 하지, 이번 주 성경암송도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리 순종하니까 됐다. 나는 그리 두기로 했다. 노아라고 안 그랬을까? 아브라함이나 모세 또한 안 그랬을까? 나는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의 짐’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 39:4, 62:3, 74:10).

 

저마다 우린 각기 다른 문제나 형태로 호소한다. 투덜거리고 칭얼거리면서도 다시 주의 말씀을 의지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그래서 친구가 성경공부를 그만두겠다고 해도 혹은 소진되어 한동안 쓰러진다 해도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겠다. 왜냐하면 오늘 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양각색의 사람들이나 한 마음으로 붙들린 것은 성령으로다.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17).” 그러므로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18-19).”

 

그렇게 나는 몇몇 누구의 블러그에 매일 가본다. 누구는 서너 줄짜리 짧고 급한 묵상을 글로 쓴다. 누군 구구절절 자신의 느낌과 함께 시댁과 친정의 일을 연관 지어 말씀에서 답을 구한다. 나는 다만 저들의 묵상글이 며칠째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안타깝다. 그 내용을 보며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 읽고 ‘좋아요’를 누른다. 나름의 ‘아멘’이다. 이른 아침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가끔은 야근도 하는 가운데서도 매일 새벽예배를 나가는 친구에게 나는 응원과 격려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분명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어떠하든지 그럼에도 순종하는 것과 그리하여 성령이 함께 하심을 보며,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지금 그 시간이 귀하고 아름다운 일임을 안다. 내가 주께 감사하는 것은 ‘하기 싫어서’ 울면서도 신학교를 끝까지 마친 것이다. 그때도 물론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그래서도 못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안 하면 안 되나요? 하고 울면서 운전하고 학교로 갔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은 좀 어떠한가? 여전히 이게 뭔가? 싶은 생각에 때로는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면서 누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이처럼 고단한 일임을 알기에, 정말이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가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왜 없겠나? 어쩔 땐 이 몸 하나 건사하는 게 고단해서,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나 저는 저대로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이니까… 더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하나님은 계속 내 안에 저를 구겨 넣으셔서 신경 쓰이게 하시니까! 때론 나 혼자 짝사랑 하는 사람 같다가, 때론 연애하는 사람처럼 애달파하다가, 또 이게 뭔가 싶은 자괴감도 들었다가… 그러면서도 이처럼 주 앞에 나오고, 말씀 앞에 앉는 것은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뜻을 따름일 테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21).”

 

이 간단명료한 말씀 앞에 안도한다. 오늘 저들도 같은 심정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갈팡질팡 마음은 어렵고 그 짐은 무거운데,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8-39).” 결국은 성령으로였다.

 

내가 하려 할 때는 그 일이 고단하기만 하다. 나의 그 고단함까지 주께 맡기고 오직 성령으로만 오늘도 한 날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요즘은 부쩍 누구 일로 마음이 어렵다. 그리 결정했다는데, 더는 내가 나설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저로 인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런 게 아니면 나도 내 마음의 출처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인간적으로는 그리 좋아할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한다.

 

좋을 때나 좋은 것은 개나 고양이만 못한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네 고양이를 어디 다른 동네로 보낸 적이 있다. 그런 게 한참이 지났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대청마루에 누워 볕을 쬐고 있던 것이다. 나는 도로 데려오셨는가? 하고 물었더니 어떻게 그 먼 길을 혼자 찾아왔는지 알 수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 알면서도 혼자 이처럼 속 끓이는 게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읽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그와 같으셨다는 것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곧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하심은,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속 끓이고 마음 졸이며 그야말로 오바하나 싶은 것이… 그러하여 내가 못살겠어서 주를 찾고 간구하는 것이겠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1-2).

 

내가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로 쩔쩔매면서, 누구 저 나와 상관없는 이로 마음 졸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리하게 되는 것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이 또한 주로 인한 것이라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5-6).

 

하여,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6-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