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전봉석 2024. 2. 4. 06:08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행 3:5-10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1-2

 

 

주의 놀라운 일이 놀라운 일로 끝난다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우리로 지속적인 기도를 하게 한다. 이로써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이 능력이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1).” 이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기도하는 능력은 어느 순간 우리로 주목하게 한다. 전부터 있었던 이였으나 그 순간은 별개였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2).”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고 다가가 말하여야 할 때가 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지, 능력을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항상 구하였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하면 어느 순간 그 필요한 때에 열어주신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그게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그리하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기도는 주께 올리는 것이나 우리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다.

 

내 곁의 누구를 생각하며 혹은 그러한데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누구를 위해 중보는 기도로 준비된 자를 만든다. 교회 밖에 고통 중에 있는 이가 있고 교회 안에 문제가 되는 이도 있다. 오늘 저는,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 저들을 알지 못했고 혹시나, 하고 무엇을 얻을까 해서 바라보았을 뿐이다. 영적으로 닫힌 삶이란 얼마나 추레하고 비참한가? 그 구함이 늘 한정되어 혹시 뭐 없나? 하는 구걸의 정도여서 자신의 쓰임을 알지 못하고 허비한다. 곧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그러니 영적으로 게으른 자와 함께 있으면 덩달아 고달프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4-35).”

 

우린 이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시는 능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1-12).” 그런 자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6-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린 다만 외칠 뿐이다. 손을 잡을 것이고, 일으켰을 뿐이다. 앞서 “우리를 보라” 하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기도에서 나온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내 곁의 아무개에게 나의 지금이, 오늘이, 매순간이 ‘예수를 아는 냄새’이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읽히는 편지’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이를 자주 되새기며 아침마다 나온다. 새벽에 일으켜 집을 나선다. 말씀 앞에 앉히고 나로 묵상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고 누구더러 자랑할 게 없으나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기도할게, 기도하자 하는 말을 누구에게든지 자주하게 되는 것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는 자들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로 생활이 곧 예배가 되고 일상 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가만히 운전하면서 혹은 자다가도 주님, 하고 부르고 어떤 이를 생각하는 것으로 산 예배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와 함께 동행한다 함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뭔가 그럴듯한 종교적인 행위로가 아니다.

 

의식에 따른 경건이 아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중요하고 율법도 버려서는 안 되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누굴 생각하는 일, 저로 마음을 쓰다 작은 일 하나라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게 되는 것. 이것이 그 어떤 거룩을 위한 종교적 행위보다 귀하였다.

 

우린 얼마나 경건의 모양을 따르는지. 실제 삶은 허례허식과 남의 눈을 의식하며 행하는 일이어서 정작 자기 안의 양심도 안다. 알면서도 이를 무시한다. 외면할 때 신앙은 가짜가 된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과 기분을 먼저 차린다. 그러느라 주의 뜻은 거리가 멀다. 앉은뱅이 같은 신앙, 여전히 구걸하듯 온통 그 기도의 전부가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어떤 일을 두고 그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손을 내밀 따름이다. 오늘 저 걷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 우리 신앙의 실체는 아닐는지? 이제 자신의 희생도 혹은 손해도 감수하며 선을 이루고자 할 수 있을 터인데 여전히 구걸하는 성도로, 앉은뱅이 같은 신앙으로 성전 미문에 앉아 있을 뿐이어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나간 것도 아닌….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이를 돌아보고 이제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위하여 드려지는 삶이 될 수 있을 터,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과연 내 안에도 그와 같은 마음이 간절한지? 심지어 교회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기는 하고 있는지? 가령 나는 누구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헌신을 먼저 준비하고 있는지? 행여 쓸 거 먼저 다 쓰고 남은 것으로 혹은 남은 게 없으면 그것은 예외로 놓기도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우린 실상 정말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게 우선이지 않기 때문에 미룬다. 그래놓고는 요즘 힘들다고 투정이다. 먼저로 할 것은 다 하면서 말이다.

 

이상하지? 그런 자들이 늘 보면 남을 탓한다. 누가 어찌 저러는가? 하고 서운해 한다. 그 일은 하나님께도 향한 마음이 되어 정작 자신이 받을 은혜의 그릇은 준비하지 않고서 은혜가 자신에게만 없다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또는 그 그릇이 고작 간장종지만하면서 누구처럼 대접에 주지 않으심을 서운해 한다. 그러는 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나 역시 늘 그 일로 씨름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야말로 씨름하게 한다. 나의 필요가 우선이다. 그런 뒤 하나님은 나중이다. 교회에는 인색하다. 남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다. 자신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나 돌이켜 보면 그것으로 늘 구멍이었다는 것을 저는 모른다.

 

가령 나는 교회의 임대료나 그 필요에 우선한다. 아내는 얼마 안 되는 70만원 목회자 사례를 우선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고 왜 먼저 우선하는 것으로 마음이 어렵지 않겠나? 이는 또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께 드린다는 것은 의무도 형식도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 십일조가 그렇게 아깝거나 도저히 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것으로 오늘 자신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세금 떼이듯 아까워하는 마음으로나 심지어 이를 쪼개어 여러 헌금으로 나누어서 드리는 중이라면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것을…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게 실은 전부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일일 텐데, 당장 우리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빚을 내서라도 처리할 일을 하물며 주의 일에 우린 얼마나 못마땅한 듯 아까워하거나 계산적인 사람이 되는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특히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말하기 참 어렵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십일조를 기준으로 모든 헌금으로 행여 주저하거나 나중으로 여기는 것이면 그 정도가 딱 지금의 자기 신앙 수준이고 받은 은혜의 정도이다. 말로는 구원을 다 이뤄 마치 천국을 다 가진 것처럼 행세한다고 하나 나의 가진 전부가 실은 주께 받은 것이니,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상하게 교회에 인색하거나 두려워할 줄 모를 때 남에게도 인색하고, 그런 자가 자기 것은 늘 우선으로 한다. 그러면서 구걸하듯 늘 손을 내밀고 교회 문에 앉아 기도하는 내용이란 온통 뭐가 그리 잘 되길 바라는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과연 나 역시 주저하지 않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머물고 있는지? 실은 내가 따로 준비한 게 있어서 달리 또 피할 곳을 예비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실은 누가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인사치레로 명절 날 선물은 빚을 내서라도 여기저기 다 돌린다. 예정된 일이었다며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골프도 치고 할 건 다 한다. 사업은 확장하고 빚을 내서라도 투자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인색하거나 외면한다. 남의 것으로 자신의 모자란 작은 것을 우선 채운다. 실상은 우리 신앙이 언제까지 뭐 없나…? 하는 심사로 손을 벌려 구걸만 하고 앉았을지 모를 일이다. 언제쯤 우리가 먼저 돌아보아 예수 이름으로 손을 내밀어 일어서지 못하는 자를 잡아줄 수 있을지? 참된 은사는 드려지는 것과 비례한다. 그 시간과 물질과 마음으로 안다.

 

내가 아는 누구는 그러다 모든 걸 다 날렸으면서도 기꺼이 다시 드린다. 분명 선교사들의 거처를 위하였고, 저들이 귀국하여 함께 한다면 주가 주신 은사로 상한 심령들을 위할 수 있을 거라 여겨 한 마을을 치유마을로 건설하는데 자신의 전 재산과 빚까지 지며서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서로의 암투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 무산되었고, 파산까지 하여 실패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분명 이 땅에서의 성공 그 이상으로 받으셨을 것이다. 그리 믿음으로 남은여생을 또 다시 헌신한다. 마치 욥의 고백처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신앙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저들은 순교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나는 이 놀라운 믿음을 소망할 따름이나 늘 자신이 없어 주 앞에 송구하다. 다만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오직 믿음으로 이 길을 감당할 따름이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