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전봉석 2024. 2. 14. 04:52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7-48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저들이 버린,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우리의 주춧돌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거절한 복음이 이방으로 건너와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까지 임하였다. 주의 말씀을 전하거나 그 삶을 권할 때 이를 거절함으로 저의 것이 옮겨지는 경우를 종종 느낀다. 우리가 누굴 위해 기도하거나 어디 들어가 기도할 때에 그 축복의 기도를 받지 않으면 그것은 옮겨져 다른 이에게로 간다. 오늘 바울은 이를 전한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7-48).”

 

이후에 숱한 ‘바울’들이 이방으로 옮겨가는 데 있어 때로는 전쟁의 물결을 타고, 때로는 상인의 걸음으로 옮겨져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이때에 바나바와 사울 곧 바울을 선교사로 내어보낼 수 있을 정도의 안디옥 교회는 건실하였다. 보면 늘 자기 교회 부풀리는 데 혈안이 된 곳이 있고, 일정부분이 차면 분가시켜 새롭게 개척을 돕는 교회도 있다. 그럴 때도 어느 교회는 기업형으로 이를 늘리면서 관리하려 들고 어느 교회는 자립하여 독립된 교회로 우뚝 서기를 돕는다.

 

가령 친구네 교회는 모 교회의 지 교회인데 주일 날 본 예배는 대형 스크린으로 모 교회 담임 목사의 설교를 송출하여 몇 곳이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듯 하나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글쎄, 나는 그리 좋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아무튼 오늘 초대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을 위시하여 박해자였던 사울 바울과 바나바를 주의 일꾼으로 세워 파송한다. 이는 예수님이 그리 명하신 것으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이에 그 후로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이때에 다양한 계층이 모여 교회의 건강성을 보여준다. 출신 배경도 인종도 지역도 다르면서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 교회로 우뚝 서 유대인은 물론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모여 다양하고 온전한 화합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자유인도 종도 한데 모여 예배드렸다. 모교였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의 구성원과는 대조를 이룬다. 교회의 건강성은 신분과 출신과 성분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개개인은 각자의 주의 일에 동참한다.

 

우리가 누굴 가리거나 꺼려함은 옳지 않다. 우리도 일개 한 이방국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우리 곁에 두시는 어떤 이, 저를 주가 맡기심에 대하여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데 따른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사교적인 모임의 구성원이 아니다. 서로는 각각 주의 피값으로 사신 독자적인 교회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서열이 있을 수 없고 일률적이고 획일화된 모형들의 집단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별의 별 사람들 속에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고,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 13:6, 8).” 그야말로 가라지와 알곡이 같이 자라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우리의 이 하나 됨은 기이한 일이어서 주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서로가 달라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어 이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것으로 귀히 쓰임을 받는 것이 중요하였다.

 

보면 우린 저마다 자신의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 믿음은 선물이라 주께서 값없이 주신 것이나 각자의 신앙은 그 쓰임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깨끗이 하는 일이어서, 여호수아의 단호한 선언이 문득 떠오른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같이 믿으면서 달리 갈 수도 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하나처럼 움직이는 일은 없다. 사람 다 가지가지라 각자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으로 받기 마련이다.

 

같이 말씀을 나누는 데 있어 진리가 아닌 것에 있어서는 나는 굳이 상대의 어떤 주장을 반박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전하였을 뿐 듣고 이에 응답하는 것은 서로의 신앙의 몫이다. 헌신과 수행은 다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이는 우리가 임의로 판단하고 선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주째 누구 일로 저와 입씨름을 하듯 그건 아니라고 일렀어도 결국 저들은 그리 선택하여 갔고, 나로서는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허탈하고 마음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들 결정한 일, 부디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할 뿐. 여기서 한나가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며 약속한 대로 성전에 남겨둘 때 했던 말처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7-2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비파는 비파로, 수금은 수금으로, 내 마음은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주의 일은 계통발생이면서 개체발생으로 우리 모두가 한 복음을 받았으나 바라바는 바라바로, 사울을 바울로, 시몬은 베드로로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각자의 몫으로 주를 따르고 섬기는 데 있어 그 신앙은 개체발생을 이룬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내가 저들의 신앙을 통제하고 억압하여 강제할 수 없는 일과 같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오늘 사울과 바라바가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서는 일도 말씀을 이루심이다. 저들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그렇게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4-5).” 저마다의 사명, 그 보내심에 따른 수행은 각자의 맡겨진 역할과 그 자리를 지키는 데 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삿 9:8-13).”

 

이 우화의 한 단면에서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14-15).” 스스로의 선택이 그 신앙의 정도를 판가름한다. 결국은 그렇게 하여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16).”

 

마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 하심을 어기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길을 갔던 것처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스스로 그리 선택한 것이라 그와 같은 자리에 들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주의 일에 힘쓰지 않으면 세상일에 힘쓰게 돼 있다. 주의 일과 세상일을 구분하지 않으면 그 속에 주의 영이 없거나 활동을 중지하신 상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만큼 주의 일은 축소되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나는 그렇게 자주 고백한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허용한 그 작은 틈새로 둑이 터지는 것이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3:16).”

 

할 때에,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41).”

 

그러니 같은 말씀으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일이어서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5-46).” 사람과 사람, 더러 그 어쩔 수 없음 앞에서 나는 이제 말씀을 기준으로 주의 뜻으로만 따라가기를 기도한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1-52).” 당당히 가야 할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이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25:1).

 

말씀으로가 아니면 갈대와 같아서 스스로의 마음도 갈피를 잡을 길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그러므로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