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4. 2. 12. 05:43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7-18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렵다. 같은 일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서로 다른 가운데서 한쪽의 일을 이해하기에는 오해가 먼저 따른다. 이때에 말이 필요하고 그 설명은 주 안에서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인내도 필요하다. 다른 성도의 다른 시선을 감내할 필요도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되 주의 이름으로다. 주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오해 없이 하는 데는 더러 고난이 따른다. 더욱이 가까운 사이였던 곳에 함정이 있다. 서로 잘 안다는 사실이 선입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 38:11).

 

어려울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멀리 설 때도 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55:12-14).

 

더욱이 교회란 곳의 사람과 사람 사이가 졸지에 원수보다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신앙이 때론 장벽이 되어 서로 타협의 여지를 없애기도 한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공연한 오해나 공격은 다반사이다. 그것도 같은 길을 걷던 자에게서 혹은 가장 가까운 동료에게서 말이다. 오늘 베드로는 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이방인 고넬료와 함께 하였던 사실을 두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르기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돌아볼 때 자신들도 그러했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7, 18).”

 

이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일찍이 어려서부터 교회는 이런 일로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한동안 교회 안의 사람을 더 경계하고 불신하기도 했다. 같이 동역하였던 자가 갑자기 돌아서서 개척할 때 드린 헌금을 돌려달라고도 하고, 성전을 짓다 그에 드는 비용을 가지고 사라지기도 하였다. 별의 별 사람들을 다 겪으면서 교회에서 돈과 이성과 정치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애매한 고난은 각오해야 한다. 갑자기 공격하거나 외면하여 등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베드로의 자세하고 진솔한 설명과 이를 받아들이는 자의 서로 다른 자세를 보게 된다. 친절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하여 어떤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주 안에서 이해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특히 서로 간증함은 사사로운 개인의 무용담이 아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증거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간증이 함정이 될 수 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의식이다. 자신의 경험이 남다른 것에서 스스로도 무덤을 판다. 이에 겸손은 간증의 기본이다. 보태거나 꾸미는 일은 자기만족의 허상을 만들 수 있다. 남다른 경험으로 욥은 비로소 고백하길,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설마 이것으로 우쭐하여 자신이 특별하다는 오해는 스스로를 속이며 교만하게 한다.

 

우리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에 복음은 서로에게 다른 것일 수 있다. 곧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그러니 주 안에서 하나 된다는 게 우리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주를 사랑함으로 저를 이해할 수 있다. 주 안에서 저의 사정을 감안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는 오해뿐이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19-20).” 이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4-5).

 

서로의 다름을 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틀린 것을 죽어도 틀린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예, 혹은 아니요, 뿐이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진리는 탁류가 되어 흐른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데서 더러는 침묵 속으로 침잠케한다. 서로의 거리두기로 멀찍이 하는 것도 좋다. 같은 곳을 향해 가나 다른 길로 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러므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어느 쪽이든지 우리에게는 의원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1-12).”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자란 나로서는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의 이중적인 태도에 있어 이제는 침묵한다. 예전처럼 저들을 혐오하며 교회를 멀리할 수는 없어서이다. 

 

서로 말을 한들 싸움뿐이라, 덕이 되지 않을 바에는 피하는 것도 상책이다. 서로 같이 해야 할 때가 있고, 떨어져야 할 때가 있다. 이해해야 할 게 있고 인정해야 할 것도 있다. 인정함은 이해가 부족할 때 귀하다. 모든 게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이란 본디 자기 쪽에서 보는 것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5-6).

 

더러 나의 허물조차 주를 나타내는 데 귀히 쓰일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고로 회개와 자백은 같이 이뤄져야 한다. 더러는 사람으로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의 뜻을 배우게 한다. 그래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67, 71).

 

고난은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좋을 리 없는 어떤 고난으로, 그 어려움으로 주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그러므로 우리로 살게 하시는 이가 오늘도 새로운 조성을 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이에,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잠잠히 주를 바란다는 일은 때로 외톨이가 되고 외면당하는 일이 되기도 하나,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오늘 말씀으로 나는 시편의 간절함, 주를 바라는 데 있어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1).

 

그것이 얼마나 절박한가 하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묵묵히 주를 바라며 기다리는 일도 사명이었다. 그러할 때,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3-4).

 

그러므로 다시 또 다시 또…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