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2:24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8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살았다.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심이 아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는 많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주를 더 의지하고 갈망하는 믿음을 더했다. 당시 교회의 뿌리가 내려지는 데 있어 야고보의 피는 거름이 되었다. 죽이시거나 살리시거나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심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
이에 오늘 시인은 찬송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8).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음으로 굳건할 뿐이다. 어떤 사안을 두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데 대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더러는 그 상황만 보고 마음이 어려워 교회를 떠나고 주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한 아이엄마는 일찍이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었다. 그러다 첫 애를 기형으로 낳고 주께 몸부림치며 아이 회복을 호소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아이는 목 아래 전신마비가 되었다. 결국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교회를 떠났다. 후에 하나님은 둘째를 주셨는데, 이에 완고해진 마음은 큰 애의 존재를 감추고, 이를 둘째에게도 씌웠다. 둘째는 자라면서 혼자가 아닌 혼자인 채로 성장했다. 아이와 글을 쓰게 되면서, 이러한 사실을 토로하며 서로 한참 울었다. 이를 글로 쓸 용기를 내기까지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감사하게도 아이의 글은 좋은 결과로 이어져 대학까지 갔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알고 아이엄마는 글방도, 교회도 못 가게 하였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았을 때, 그렇게 꿈이 많고 밝았던 아이가 졸업을 하고 심한 우울증으로 아파트 밖을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소식에 마음이 아파서 이리저리 애를 썼지만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을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우리로서는 기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가 마주하는 믿음은 다른 것이어서 누구는 그와 같이 믿음으로 더욱 가까이 하며 굳건하여지고, 누구로서는 그 믿음의 실의에 빠져 교회를 떠나고 서로를 등진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5-36).”
만물의 원리가 주의 쓰심에 있다. 사탄은 틈을 노려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우리로 노린다. 주를 멀리하게 하려 한다. 주님은 날 위해 기도하시며 이를 알기를 원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누구라도 그 당사자가 되고보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안다.
어제는 아이가 명절 끝에 인사를 왔다. 본가에서 명절을 쇠고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아이에게 당부하기를, 주께서 베푸신 은혜의 좋은 결실이 행여 너의 인생에서 주를 멀리하게 하는 안일함과 나태함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일렀다. 앞서 그 위의 한 아이가 그 길로 갔다. 서로가 생각지도 못한 그 이상의 결과로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절실하였던 상황이 사라지자 교회를 멀리하고 주를 등지고 떠났다. 그때 아이도 같이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아이에게 과분한 은총으로 더욱 겸손히 주를 바라며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혼자 생활하면서 안 믿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주를 멀리하기가, 삐끗하면 현실이 될 수 있다. 저도 안다. 그래서도 묵상을 글을 쓰고 짧게라도 매일 이를 실천하려 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늘 우리는 깨어 주를 바라야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평안하고 안이할 때, 혹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오늘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13-14).” 아이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같이 있던 제자들은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15).”
우리에게 안일함만큼 복잡한 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때, 더는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하기보다 주는 기도하라 하신다. 우리 성도의 기도의 힘은 크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은 일하신다. 앞서 어느 아이의 경우에도 나는 문득 생각날 때면 주님, 하고 저를 위해 기도한다. 여전히 그 아이와 아이엄마의 사연이 마음에 남았다. 몇 번 통화를 시도하고, 화상으로나마 예배와 교제를 이어보길 바랐으나 나로서는 더 갈 수 없다. 번번이 거절하는 저를 두고 나는 기도할 뿐이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다음 주말에 ‘아이 모녀’를 데리고 인천으로 온다고 했다. 나로서야 너무 멀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 과연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모든 게 합력해서 선을 이루듯 저들 담임 목사님이 모녀의 애착관계를 분리하려 하다 실패하자, 갑자기 글쓰기를 권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은 할 수 없다고 하자 친구는 내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했을 뿐이고, 성령은 일하실 따름이다. 친구가 처와 함께 그 모녀를 데리고 직접 인천까지 오겠다는 것도 신기하다. 서로 안면을 트고, 평소에는 줌으로 만나 글쓰기를 배우고, 카페에 글을 올려 아이의 글을 보고 지도하는 것으로 우선은 가닥은 잡았다. 지능이 60에 정서적 나이는 10세 미만이라, 고2 여자아이를 나는 어찌해야 할 지 알지 못한다.
성령이 일하신다 함은 나도 모르는 나의 수고와 애씀으로 주가 행하실 것을 입증하신다. 당연히 나는 할 수 없다. 어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두려움도 앞선다. 같이 있는 아이도 처음에는 색종이 접기나, 일기쓰기, 그림 그리기 등 별의 별 걸 다 해봤다. 그래도 이 아이와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요즘 아이는 매일 한 장씩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필사한다. 운동을 하고, 자기 일에서 성실하다. 지난 주일 대표기도를 하였다. 어휘나 마음이 또박또박하여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만 바라는 것은 주가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하여 오늘 주님은 재촉하신다.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행 12:8-9).” 때론 이 일이 가능할까? 싶어 생시인지 꿈인지, 내 의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때도 말씀만으로 충성할 수 있으면 된다. 이는 곧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심이 주의 권능이셨다. 어찌할까, 하고 그 마음에서 기도를 놓지 않는다면 성령도 일하시기를 멈추지 않고 모든 게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행할 수 있게 하신다.
다짜고짜 다음 주말에 갈게, 하면서 두 모녀를 데려온다고 할 때 나는 그 일이 어찌 가능하겠나? 하고 마음으로나 두고 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두려웠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모른다. 다만 내 안의 두려움과 망설임마저도 그것으로 주께 기도하게 할 뿐이다!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이다. 주가 일하신다는 것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린 구하고 마음에서 놓지 않을 뿐, 기도할 때 성령이 일하신다. 그때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3-5).
이 놀라운 사실은 기도를 놓지 않는 자가 거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할 수 있다 하신 이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주가 하신다는 것, 이 놀라운 사실을 내 평생에 내가 살아서 몸소 체험하며 사는 일이 복되었다. 때로는 멀리 도망치며 등을 지기도 해보았으나, 해를 등지면 어두운 그림자만 내 앞에 길게 놓이듯 해를 보고 걸으면서 나는 더 이상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일이 없다. 등 뒤에 있어 볼 수도 없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그러므로 내 영혼이 평안함은 ‘큰 풍랑이 일어도’ 가능하였다. 아내와 딸 셋을 한 날 한 시에 증기선 침몰로 잃고 지은 찬송가 413장의 신앙고백처럼, 스페포드는 그러함에도 찬송으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
내 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영혼 평안해
(새 찬송가 413장 1절).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이 놀라운 산 증거를 가지고 사는 일,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124:1-5).
그러나 주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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