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3-14
에베소교회의 사역과 드로와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전도여정을 살필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시련과 위기가 여러 번 찾아왔다. 그럴 때면 오히려 신앙은 증명되고 믿음은 단련된다. 우리가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꽃길만 걷기를’ 바라겠으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이를 바탕으로 더욱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자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그렇듯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가령 누구의 경우 저의 건강을 더하셨으면 좋겠는데 늘 보면 힘에 부쳐 병약한 몸으로 어찌 그 길을 감당하나 싶다. 또는 얼토당토않은 어려움을 겪으며 굳이 주의 일이 아니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고 마음이 어렵기도 하다. 그러할 때 상대의 굳은 마음을 녹이고, 자신의 겸손으로 주를 더욱 의지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약함으로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럼에도 이 길을 간다.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 그 일을 감수하며 가는 이의 모습은 경이롭고 눈물겹다. 다들 뭔가 종교 하나쯤 인생들 사는 동안 위안으로 삼고자 하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르시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여기서 ‘힘쓰라’ 하심은 이를 마다하지 말고 굳건히 그 길을 완주하게 하신다. 바울의 전도여정에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을 두고 시비하고 의심하며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바울은 적극 방어하며,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 9:1).” 자신의 일에 정당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후 3:1).”
맞서 싸워 상대를 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후 2:7-8).” 곧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주만 보고 향하는 여정이다. 사람이 뭐라 공격하고 이에 따른 박해를 당하여도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저마다의 앙금이 있고 그 안에 노여움은 있기 마련이나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오히려 저로 기쁨이고 사랑의 면류관으로 삼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7-8).”
그렇게 누구와 같이 시간을 보낸다. 대화를 하고 어떤 말로 설명을 더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소릴 해서 뭐하겠나, 싶은 회의가 들지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하는 오늘 이와 같은 신앙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한 영혼을 두고 저의 신앙과 그의 삶을 같이 한다는 일은 참 고단한 일이다. 때론 그 마음과 달리 오해와 갈등으로 되돌아올 때도 있다. 하면 이를 어찌 풀까? 저와 씨름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하여 주의 이름을 한 번 부르게 한다. 곧 우리가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데 있어,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결코 나의 의지나 노력의 결실로는 이를 수 없다. 하여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결국 내가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러할 때,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10).” 때로는 대화하다 진이 빠진다. 저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듣느라 기진한다. 그냥 어디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회피하고 무심하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마음은 주의 것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그러다 보면 답은 하나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자라가야 한다. 침체된 영혼으로는 더욱 힘들다. 그럴 때 신앙의 동행이 든든하고 고맙다. 오늘 4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렇듯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5).”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간다는 일은 은혜이다. 내 곁에 믿음의 동료가 있다. 저 친구의 변화와 그 사명이 보람을 더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서로에게 권하고 자랑하며 대신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25).” 그러므로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 4:10-11).”
나의 복은 전에 같이 그릇된 길로 갔다가 어디서 다시 만났을 때 주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이다. 누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믿음의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전념한다. 누군 약한 몸으로도 강단 있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느라 사나흘이 멀다하고 앓아 눕기도 하면서 포기하지 않는다. 누구는 뒤늦은 발걸음을 재촉하느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어제도 무슨 말 끝에 성경공부를 하는데 매주 시험을 보고, 성경을 암송하여 틀린 구절을 다섯 번씩 쓴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나 했을 법한 공부인데도 서로 웃으면서도 격려한다. 나이가 들면서 암기능력은 떨어지는데도, 저는 그래서 차를 두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며 성경어플로 듣고 읽고 하면서 성실하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삶이다. 막연한 위안이나 만족을 위한 게 아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9-11).” 누구는 그러다 세상을 갔으나 우리는 묵묵히 내친 걸음을 다한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2).”
아가서를 준비하면서 나는 ‘술람미의 여인’이 된다. 도저히 사랑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는 것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 앞에 놀라울 따름이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사귐은 때로 기이할 따름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3-5).”
이 사랑을 알면서 나는 누구 때문에 애쓴다. 시간을 내고 마음을 들여 저에게 알게 한다. 주를 설명하다 사랑의 언어를 배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여서 호세아가 이내 고멜을 사랑하였던 것 같이,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그럴 가치도 대상도 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씨름한다.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2:2).” 우리 안에 죄를 향한 마음이 끝도 없어서,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5).” 사랑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서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7).”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14-15).”
나는 아가서를 준비하다 운다. 나를 향하신 사랑이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숨을 고른다. 저가 나를 신부로 삼으셨다. 이를 알고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13).”
이에,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오늘도 나로 주를 바라게 하심은,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이러한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한다. 친구의 가는 길을 격려하고 응원한다. 저의 열심을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132:2-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7).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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