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20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십일조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바로미터다. 신앙의 기준이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초이다. 어느 순간 그리 하게 되고 이는 마땅하여서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이 일이 가능하였다. 내 몸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모든 게 주가 더하신 것을 인정하는 데서 이 일이 가능하였다. 헌금에 대해서는 듣는 이나 전하는 이나 자칫 마음이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어제 한 본문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눅 16:1-13)을 설명하다 나는 친구에게 앞서 그와 같은 사실을 설명한 바 있고 저는 언제부턴가 이에 주 앞에 드린다고 하였다. 우리가 주인의 것을 맡은 자로 살며 주인의 뜻을 안다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저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듯하나 주인은 자비를 원하고, 종은 주의 것을 그리 행하였음이다.
말씀을 설명하고 풀어주면서 나 역시 새롭게 말씀을 열어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산다는 소리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 있어 이에 따른 이해가 성령의 감동으로였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하여,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9-10).”
새삼 놀라운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그 마음 역시 주가 주시는 것으로, 주가 알게 하실 때 가능하였다. 며칠하다 그만둘 줄 알았는데 그 이상으로 이미 깊숙하게 그 삶은 주 앞에 다가가 있었고, 십일조 생활까지도 마땅히 여기며 하고 있다는 말에 놀랐다. 내가 아는 저는 자기 것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줄 줄을 모르고, 그리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에게는 철저하나 남에 대하여는 무심한 편인데, 언제부터였을까? 돌아오는 토요일에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아픈 모녀’와 함께 오겠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곧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주가 하신다는 것, 하게 하신 이가 결국은 이루어가고 계심을 알겠다. 때로는 저를 책망하거나 뭐라 단도직입적으로 일러 말하기도 한다. 친구여서 가능한 지점인데 이것까지도 저는 주저함 없이 받는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제자들’에게 바울이 물었다.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2).” 그러자 다시 묻기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3).” 우린 흔히 이러할 때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리 묻는 바울도 순순히 자백하며 고하는 어떤 제자들도 순전하였다. 그렇듯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흔히 친할수록 뭐라 하기 어렵고 그런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감정이 상하기 쉬운 일인데,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25:12).” 우리의 지혜는 역시 달라서,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13).” 우리가 각자의 삶을 맡은 자로 살면서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실제 이는 아무나 가능하지 않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하심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실제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누가 내게 뭐라 나무라거나 바른 길을 바른 말로 일러주는 사람이 없다. 요즘은 아이들도 섣불리 뭐라 할 수 없는 시대여서 저마다 자신이 옳은 줄 알고, 그것에 옳다 옳다 해줘야 좋아하지 행여 뭐라 충고라도 하고 한 마디 일러 말해주려 하면 졸지에 서로의 사이가 어색해지거나 갈라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 특히 친구와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설명할 때에 서로 안다는 게 벽이 될 수도 있고 문이 될 수도 있다. 결론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알 수 있는데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그 말을 자기를 향한 말씀으로 듣게 하시는 이의 도우심이 절대적이었다.
곧 구하여야 한다. 나는 자주 서로가 그리하자고 권한다.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나 궁극적으로는 각자가 사는 데서 이를 실천하는 일이어야 할 텐데, 듣기를 마다하거나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면 그게 어디 수월하겠나 싶어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어쩌면 지난 주간부터 친구는 성령을 구하고 자기 안에도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바라였다. 그리하여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이와 같이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돌아볼 때 주가 알게 하신다. 누구에게 뭐라 하기 전에 앞서 주가 나의 삶을 붙드신다. 어떤 이를 생각하고 그 일을 두고 주께 아뢸 때 주께서 어찌 행하실지 나는 자주 두렵기도 하다. 우리의 성장은 서로가 같이 자란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와 같은 사명감이 먼저 내 안을 주도하실 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 11:1-2).”
서로가 서로의 본이 되는 삶이란 그 자체로 이미 선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여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우리가 주의 부르심에 응하였다 하는 것은 이미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로 산다는 일이 된다. 안 믿는 가정에 작은 불씨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를 대하는 데 있어 저에게 주님을 대신해야 하는 사명자로 세우심을 받는 일이었다.
이를 세례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이 일을 오늘 우리도 행하고 사는 것이다. 누구라도 우리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주를 전하는 사명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 3:2-3).”
우리는 순종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어제도 출근길에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고 특히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올 모녀의 일을 두고 서로 기도하기로 하였다. 주가 어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어 일부러 지하철로 와 본다는데, 노선은 단순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나는 고질적으로 앞서가는 나의 염려를 두고 주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저들이 왔을 때 모친은 조현과 우울로, 아이는 우울과 지능저하인 상태인데 과연 내가 무얼 어찌 행할 수 있을까? 염려가 앞서기는 하나 그리 행하시는 이가 어떤 계획으로 그리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소위 나는 주의 마음으로 저들을 대하고 주의 인도하심으로 저들을 마주할 따름인데… 어쩌나, 하는 심정은 별 수 없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기도한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나를 두고 살면서 그런 내게 주가 이끄시는 일이었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서로 각자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실 터,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나도 무슨 배짱으로 선뜻 오라 했는지 모르겠다. 뭘 어쩌겠다는 계획도 생각도 없다. 특히 아이를 대하는 일에 있어 우리가 과연 지속적으로 그 일이 가능할까 알 수 없지만 것 또한 주가 하실 일이고… 나는 다만 마다하지 않는 것. 그 시간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주가 ‘그들의 땅을 고치실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 그러한 일의 진행에 있어서는 주가 행하시는 바, 오직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내게 맡기셨으나 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모든 일에서 주가 행하실 것을.
다만 우린 그리 믿고 앞으로 갈 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그리할 때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15).”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나의 고질적인 염려와 불안과 앞서는 여러 생각을 가지고도 앞으로 간다. 그러자고 하고 내내 여러 생각으로 시달렸다. 어찌할까? 하고 시달리면서 주를 바랄 때, 오늘 시편의 노래가 나의 찬송이 되고 기도가 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앞서 염려하느니, 감당하지 못할 일이면 주께서 피할 길도 주실 것이다. 친구가 처음 성경을 알고 싶다고 했을 때도 친구여서 망설이면서 혼자 끙끙 앓던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께 의뢰하면 되었다. 그러할 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이와 같은 평안은 정작 그 일을 감당하면서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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