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전봉석 2024. 2. 22. 04:29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행 21:34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막무가내로 진리를 전파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질서 가운데 확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것처럼 이 땅의 바른 질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바탕이 된다. 때론 그 일이 미련한 것 같으나,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우린 우리의 이해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우리의 모양과 형상이 주를 짐작하게 하고, 그 삶의 반경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오늘 본문은 이에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1-3).” 바울의 이러한 경로에 따라 삶이 제한되고 옮겨지듯이 믿음을 따라 사는 일도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어 주어진 각자의 생활반경을 따라서 연결되고 이어진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매인 바 된 삶을 사는데 있어 서로의 받아들임은 다를 수 있다. 오늘 4절과 13절은 각각 같은 성령으로 다른 의미를 받는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3-14).”

 

같은 성령 안에서 다른 매임을 받을 때 서로를 존중하고 이를 지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나 획일화되고 일률적인 것은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 곧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의도와 목적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있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 곧 그 말씀의 뜻과 의도하시는 바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린 자주 성경을 오해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각자 그 형편과 처지에 있어 하나님은 그에 맞는 삶을 요구하신다. 일률적인 형식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린 깨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변치 않는 진리의 깊이에 있어서는 양보할 수 없으나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폭에 있어서는 서로가 다를 수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의미로 주를 바랄 때, 이와 같은 다채로움이 우리로 더욱 전인적으로 주를 사랑하게 하고 서로 하나 되어 주를 따르게 한다.

 

가령 나는 묵상을 권할 때 글쓰기를 같이 추천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해와 상식으로 글을 쓰면서 말씀을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데 유익하여서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글쓰기에도 누군 메모형식으로, 누군 구어체로 혹은 문어체로, 산문과 운문으로 각각의 표현과 방식이 다를 수 있다. 획일화된 어떤 정형화 된 행함은 진리의 무궁함을 축소하거나 궁색하게 한다.

 

사람은 저마다의 지문이 다르듯 그 사정과 형편도 성격만큼 다르다. 말씀을 인정하고 바라는 데 있어 나름의 특색이 있다. 다만 자신의 특성을 남다른 방식으로 여기거나, 우쭐하여 그것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린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모두 알 수 없다. 오늘의 우리는 한계가 각자 알게 하시는 정도에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곧 개개인에게 있어 그 이해의 폭은 달라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자라면서도 각 시점이 다른데, 남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는 어련하겠나?

 

같은 형제지간에도 다르다. 성도들 각각의 형편과 그 성질에 따라서도 다르다. 여기서의 다름은 진리가 아니라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이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 26:45).” 같은 사안을 놓고 우리를 쉬게도 하시고 앞으로의 일을 알리시기도 하신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쉼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된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눅 21:37-38).”

 

하여 주 안에서 적당하다는 것,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일이 사역이다. 건강을 살피는 일에서 스스로의 영역 이상의 것으로 무리하지 않는 것도 순종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모두가 서로 같을 수는 없다. 같은 진리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는 진리가 변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받을 수 있는 역량으로 더 넓은 천국의 확산이 된다. 그릇이 서로 다르듯 쓰임도 다르다.

 

토요일에 ‘모녀’를 데리고 오는 친구는 어떻게 할까? 하고 전화로 물었다. 처음에는 점심을 먹고 오후에나 오는 것으로 했다가 오전에 서둘러 일찍 오는 것으로 사정이 바뀌었던 것이다. 나 역시 생각은 많아도 주께 묻고 또 생각하기를 여러 번 할 뿐, 달리 더 아는 것은 없다. 다만 그때에 주가 인도하실 것을 안다. 그리 말해주었다. 친구는 자신들이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리 단숨에 될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주가 인도하시는 대로, 서로가 행여 오해가 없기를 조심하면서.

 

자칫 내가 남다른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오는 것이면, 그것도 주의하게 해야 한다. 나도 같은 사람일 뿐, 의사가 아닌 같은 환자로서 만나는 것 뿐이다. 이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런 자리, 그런 만남, 그리 이루어지는 데 따른 놀라움에서부터 나는 다만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려는가…? 하고 궁금할 뿐이다.

 

우린 주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행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이것으로 충분하다. 기적이다. 친구가 다른 가정의 모녀를 직접 데리고, 저들의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4-18).”

 

그러므로 주가 행하신다. 우린 다만 말씀으로, 기도로 합력하는 것이다. 이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럴 때 우리는 주의 기쁨이 된다. 이러한 마음과 계획과 만남으로도 이미 그러하다. 어떻게 될지, 계속 유지가 될지 혹은 처음부터 맞지 않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또한 이 일로 아이나 아이엄마가 어떻게 달라질지, 혹은 그대로일지, 나는 무엇도 장담하지 않는다. 장담하지 않음으로 자유하고, 이만큼 더 한 걸음 다가서서 피하지 않는 정도이면 족하였다.

 

가볍게 또한 자유하게 얼굴을 익히고, 오후께는 서로들 소래포구에 가서 바다도 보고 젓갈도 좀 사고… 그러다 또 다음을 허락하시면 그때는 아이를 두고 자리를 피해주든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으나 주가 어찌 행하실지는 안다. 주는 선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를 어찌 하실지 알지 못하나, 알지 못함으로 자유하다. 때론 무모하게 혹은 막연한데도 심령에 매인 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우리 영혼으로 자유하게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7-8).” 때론 주가 왜 이러시는가, 알 수 없을 때도 그 일로 또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다만,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20).”

 

무엇보다 나는 두 시간 넘는 거리를 누굴 위해 같이들 오는 친구내외가 훌륭하다. 그런 마음을 주신 이도, 이를 실천하게 하시는 이도, 그 날에 함께 하심으로 행하실 주의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앞서 간 믿음의 선친들도 이와 같이 행하였겠구나! 갈 바를 알 지 못하면서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도, 앞서 언제까지인지 기약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방주 짓는 일에 무던하였던 노아도, 상대가 안 될 막강한 애굽을 상대로 민족을 이끌어내는 일에 있어 모세도…. 저들도 별 수 있었겠나? 오직 주를 신뢰하는 수밖에.

 

오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그리로 향하는 일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그러므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7).”

 

우리가 아는 하나님, 그 진리로 서로 하나 되게 하시려고,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4-16).”

 

이내 주가 이루실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어려웠는지 너무 일찍 눈을 떴다. 잠이 달아나고 잠시 뒤척이다 서둘러 교회로 왔다. 꽤 많은 눈이 쌓여 도로가 미끄러웠다. 이른 새벽 한적한 길은 미끄러웠고, 엉금엉금 천천히 운전을 하고 왔다. 그러는 동안 동생들에게 얽힌 이런저런 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새삼 그리 이루어지게 된 주말의 만남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면서, 나는 그저 운전을 했다. 그리고 고요한 시간, 이처럼 말씀을 펼치고 당시에 바울이 겪었을 일을 중심으로 여러 군상이 사람들을 생각한다. 각자 다른 해석으로 저를 지지하거나 박해하거나… 궁극적으로는 주가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 사랑의 위대함을 가슴에 품고,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 1:8).

 

앞서 간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9-14).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는 성도의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 곧 <그리스도의 냄새>로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엔게디’는 ‘염소(새끼)의 샘’이란 뜻으로 다윗이 그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숨은 지역이었고(삼상 23:29-24:22), “고벨화 송이로구나!” 하는 것은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제 설교원고를 준비하며 다듬었던 문장을 음미하며,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일, 이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시는 말씀을 되새기며,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2-3).

 

교회로 이루어져 가는 각자의 사명으로 ‘보배로운 기름’은 준비된 거룩하신 기름으로 주가 이루실 하나 됨일 테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에서는 시온에서 우리의 화합이 축복된 열매로 드려져,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그곳을 축복과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을 테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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