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전봉석 2024. 3. 3. 05:52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7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어느 대문호의 질문처럼 새삼 사는 데 따른 각각의 의의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주신 상황에서, 슬픔으로나 아픔으로나 기쁨으로나 주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하고 오늘 말씀은 되묻는다(3). 안 믿는 자들이 잘만 사는 세상에서 믿는 자들로서 위축을 받으나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이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말씀으로 위로를 얻는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나음을 입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2). 오늘 말씀이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4).”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오직 주를 바란다는 것. 다른 무엇으로는 채울 수 없은 ‘심령의 가난함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미쁘신 주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마음은 늘 그러한데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39-40).” 우리의 행위를 돌아보아 ‘이런 상황에서도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할 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원망은 말씀을 등지게 한다. 우리가 맡은 이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는 무엇으로 주를 신뢰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나의 지난 시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이를 위하여도 말씀으로 이 자리를 다한다. 주신 삶을 받는다.

 

날씨 탓인지, 어떤 이윤지 몸이 아팠다. 끙, 하고 종일 누워 앓는 소릴 냈다. 아픈 것도 일이라, 다들 그저 그러려니 하는데 나는 주님께 오늘이 주일인 것을 아뢰었다. 주일을 섬기는 데 있어 나의 아픔이 훼방이 되지 않기를. 하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 영혼을 두고 주를 바라야 한다.

 

주의 은혜가 범사에 가득하다는 것, 우리가 주를 범사에 인정한다는 것. 이 범사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2-5).

 

내가 어찌 살았었는지, 그런 나를 주께서 어찌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다 용서하셨는지를 묵상한다. 그때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나로 오늘 안에서 주를 찾게 하시고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산다. 이를 인정할 때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지금 이 모든 서러움 가운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는 것인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생각 같아서는 보란 듯 이 모든 것에 대해 보복하고 앙갚음을 하고 싶은데… 그래서도 마음이 들볶여서 아팠는지, 걸음을 뗄 수도 없을 정도여서 일찍 들어가 종일 어려웠다. 그러다 주일 새벽, 일어나면서부터 몸이 새 힘을 얻는 것에 놀랐다. 운전을 하고 오면서도 이렇듯 앉아 묵상글을 쓰면서도, 딱 그만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여서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 해도 내 안에 거하시는 믿음의 영이 나를 붙들고 계신 것이었으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 그렇게 다시 또 살자.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자꾸만 나를 말씀 앞에 두는 이유. 말씀을 되뇌며 말씀으로 사는 일. 어릴 적 여러 기억 가운데 하나가 내 곁엔 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교회 일로 나만 홀로 여수 애양원에 자주 있었다. 그때는 소경 장로님이 자주 들르고는 하였는데, 어린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던 것 같다. 그때 그 교회에 소경이 여럿이었는데 모두가 문둥병으로 졸지에 시력을 잃을 것이라, 그 고통은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날마다 모여 앉아 성경테이프를 틀어놓고 매일 같은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하여 듣고 되뇌어 성경 66권을 통으로 다 암송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어린 눈에 신기하였던 것은 눈 뜬 이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소경 장로님들만 성경을 그리 통째로 암송하는 것이었다. 저들은 잘 때도 깰 때도 웅얼웅얼 성경을 암송하였고 모여 앉으면 서로가 같은 성경을 한 목소리로 외웠다.

 

그땐 그저 신기하였을 뿐 나는 저들의 간절함을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 행함으로 이를 확신하는 것이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이를 산다는 것.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45:17).

 

당장 주어진 현실은 우리로 원망할 수밖에 없다 하는데,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 16:7).” 어제는 모처럼 몹시 아프면서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끌탕하다 몸이 견디지 못한 것인지, 종일 앓다 졸다 반복하면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과 어떤 서러움에 누구를 원망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서도 물러섰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곧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 10-12).”

 

마치 나는 좀 나은가 하는 마음으로 억울해하진 않았는지를.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를 오늘 본문으로 인정하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3-18).”

 

말씀 앞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마치 나는 좀 나은 줄 알고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마음을 주 앞에 내려놓는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 20:9).” 어떤 일을 두고 혀를 끌끌 차면서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던 일을 회개한다. 우린 모두가 그러하여서 한 사람도 의롭다 할 사람이 없는 것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오늘도 말씀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다만 이 한 날의 은혜로 주를 바라는 것이었으니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일련의 여러 사실과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그러므로 다시 또 말씀 앞에 서자. 주의 이름을 부르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26).” 아, 말씀이 참 귀하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이 놀라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

 

하여 오늘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믿음으로 살 뿐이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143:1).

 

주께 아뢰며,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3-4, 7).

 

그리하여 이 아침에도,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