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30-31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 140:12-13
우린 모두 저마다의 어려움을 들고 주 앞에 온다. 때론 우리가 바라나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다. 오히려 악인의 길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우린 이를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낮추심은 높은 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 22:29).”
결국 우리의 겸손으로 주를 바란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이에 예수님은 가르치시길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이는 그럼 어떤 것일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있는 그대로 주를 인정하는 것. 때론 억울하고 서럽기도 하나 주를 인정함으로 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 그렇듯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러므로 모든 불행을 죄악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험한 풍랑에서도 건짐을 당했는데 섬에 도착하여 뱀에 물렸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행 28:3).” 이를 보고 그 현상만으로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4).” 저들 스스로는 그리 판단하였으나 이는 잠시,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5).”
우리가 주의 뜻을 바로 듣고, 바로 보고,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은 구별되다. 뭘 어찌 말해도 듣고 보고 느끼는 게 막힌 자들은 별 수 없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26-28).”
그러니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다. 나는 나름 사람과의 사이가 좋기를 바라나 어처구니없이 어그러져 더는 가까이 하지 못하게도 하신다. 이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우리의 모든 것으로 구원을 확장하시기 위함이다. 그때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1-12).”
오늘은 동생 재판일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려워서 일찍 잠에서 깼다. 새벽 이른 시간에 나는 교회로 나왔다. 습관처럼 말씀을 펴고 묵상을 하며 주께 구한다. 어떤 이에 대한 실망은 서러움으로 마음을 어지럽힌다.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이처럼 허무한가 싶어서이다. 그러다 문득 새로이 연결하신 한 영혼을 두고 기도한다. 두 모녀는 경쟁하듯 글을 쓴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변하여 삶이 달라지는 데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막연하지만 나는 다만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사람일 뿐이다. 이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다. 주의 놀라운 역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오늘의 현상이 결과가 아니다. 결과가 또한 끝은 아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나는 마음이 어려워서 건물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겠다. 속상하고 답답한데 누구와 마주칠까 하여 마음이 어려워서다. 나름은 잘한다고 한 것이 이렇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다. 더는 뭐라 가까이 하려 해도 우습게 됐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오늘 바울이 당하는 일련의 시련이 오히려 주를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기에 유익하였다. 더러는 듣는 이가 적으나 이로써 복음이 이방으로 퍼졌다. 하여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를 알 때에 우린 오히려 굳게 선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이러저러하여 마음이 어려울 때 내가 달려와 엎드릴 곳은 교회뿐이다. 누구에게 일러 아이를 위해서도 엄마가 주 앞에 바로 서기를 위해 힘쓰시라, 하였다. 우리가 주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주신 상황 속에서 주를 인정함으로 가능하다. 이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주가 이루신다. 어떠한 일을 통하여 주는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신다. 저로 돌이켜 주를 인정하기까지 계속하신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8).”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 곁에 그 심령이 상한 자들이 많다. 어떤 이는 그로 인하여 더욱 완고하여진다. 과대망상이 저로 자신을 억울하게 여긴다. 따라서 피해망상이 저로 보복하는 마음을 심는다. 저는 그 일로 일생을 허비하고 돈을 탕진하고 건강을 잃는다. 훗날에 주의 날이 이르면 후회가 올까? 회개의 영이 부여될까?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린 저들의 시달림이나 공격적인 면모에 맞서 말씀으로 강건하여야 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저들을 바꾸거나 돌이킬 수 없다 해도 그들로 내가 바로 설 수는 있다. 나머지는 주의 일이다.
은혜를 베푸실 때 나의 수고는 쓸모 있다. 내가 어찌 해서 이룰 수 있는 결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로 사람이 알아줄 때 나는 선 줄로 알다 넘어진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우리의 이 역동적인 삶이 복이 있다. 원수 같으나 원수로 갚지 않는 일,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다만 나는 주의 사랑으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이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그러함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주가 아신다. 그러할 때 주의 권능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신 3:24).” 오늘 특별히 이 한 날에,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나는 생각이 많고 마음이 어려울 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음으로 주 앞에 나왔다. 동생 일은 물론 나의 주변에 여러 일들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2-3).
하여 우리가 주를 바람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믿음을 지켜보면 알 일이다. 당장의 여러 마음을 물리치면서 오직 주만 바람으로,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 25:15).” 주의 행하심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무지와 오해에 대해서는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저들을 강제할 수 없고 그 생각을 고쳐줄 수도 없다. 다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이에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1-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아직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바랄 것은 부디 저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저들에겐 미련함이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부디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돌이켜 주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기를. 자신을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33:8).
다만 나의 마음은 굳건하여 주 앞에 온전하기를. 하여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2-13).” 하여 이 아침에도 말씀으로 주의 뜻을 구한다. 기도할 뿐이다. 그러할 때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참된 복이 무엇인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서 또는 어떤 이의 삶이나 그 태도를 보면서 더욱 주만 바라게 된다. 우린 설득하는 자가 아니라 증거하는 자이다. 오늘 바울은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4-25).” 그러니 다만 전하는 것뿐이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나는 할 수 없으나,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140:4).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6-7).
주가 행하실 것을 믿음으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0) | 2024.03.02 |
---|---|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0) | 2024.03.01 |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0) | 2024.02.28 |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0) | 2024.02.27 |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0) | 2024.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