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봉석 2024. 3. 1. 03:55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시 141:1-2

 

 

사람에 대한 환멸과 죄에 대한 증오가 슬프게 한다. 고작 이런 일로 서로의 신의는 무너지고 그 동안의 관계는 허무한 게 되었다. 서로는 서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라, 내가 무어라한들 나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어서 이와 같은 말조차 허무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일. 행여 저는 어떨까 하여 앞서는 조바심과 의심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목회를 피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접고 멀리 도망쳤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보고 느꼈던 사람의 앞과 뒤를 나는 혐오한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싶은 경우 그 찔림이 더 아프다. 그건 너무 지나친 기대와 이입으로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서로가 그리 생각할 테지만 한다고 한 사이에서 이와 같은 틀어짐과 균열은 영락없다. 정 주지 말아야지, 정들면 지옥이다, 하는 생각으로 먼 길을 도망치듯 살았는데… 결국은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일이 두렵다.

 

어떤 일로 누가 마음을 털어놓는다. 저의 슬픔이 또는 노여움이 안타까움으로 전해진다. 뭐라 답을 하고, 들어주고, 응원하고, 권면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가 또 갈등이 나를 주춤거리게 한다. 곁에서 이런저런 말로 주의를 준다. 그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라고 말한다. 그러니 ‘친절한 타인’으로 저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적당하여서 그러려니, 하고 와 닿지 않는 마음으로 저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을까? 곁에서 누가 하는 충고에 나는 더 상처를 받는다. 어느 시적 표현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기 싫다.

 

어떻게 성경의 영웅들은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요셉은 노예요, 억울한 옥살이로 살다 어떻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면서 오히려 저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0-21).”

 

잠을 설치고 일찍 교회로 나왔다. 동생은 일 년 육 개월 실형이 선고됐다. 항소해야 하는데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저희를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을까? 그 애도 아픈 아이라 나름 자식들보다 더 사랑하고 챙기며 돌보았던 일인데,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든 마음을 추스르며 여기까지 왔다. 사법부의 결정문은 ‘아이의 일관된 주장’을 강조할 뿐이다. 누가 봐도 다섯이나 붙은 로펌에서 연출 기획한 문장과 내용 전개인데도 아이의 능청스런 거짓말과 아이엄마의 과장된 호소에 놀아났다. 증거는 무슨, 아무 것도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스런 판결일 뿐이다.

 

설상가상 사사로우나 슬픈, 나의 사람에 대한 환멸이 또 한 번 마음을 허무하게 한다. 그 꼴란 돈 얼마 주고 말 걸 그랬나 싶은데… 나는 이와 같은 일들이 일찍이 어려서부터 반복되었다는 사실에서 주저하고 있다. 결국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일이었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진술이 뼈아프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하여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대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그런 가운데 더 있는 자가 덜 있는 자를 억누른다. 내 안에도 그와 같은 악독이 가득함을 인정한다.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지점에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서로가 옳다 하며 자신을 우선하는 현실을 산다.

 

아, 이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 나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승복하고 있는가? 일련의 일과 함께 동생 일까지 겹쳐 마음이 어려운데, 누가 자꾸 아이 일로, 자신의 푸념으로 문자를 한다. 대꾸도 하기가 싫다. 그러니 어쩐다? 한참을 들고 있다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위로와 격려로 답에 답을 한다. 답을 하면서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또 갈등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저의 고맙다는 말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떤다. 그런 이들이 항상 등을 보이며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원수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말씀 앞에 앉아 과연 나는 얼마나 정직한가를 놓고 신음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 빨리 예수 재림하셨으면 좋겠다. 이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사는 일에 치를 떤다. 죄에 매여 덩달아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놓고 신물이 난다. 그럼에도 말씀은 일러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나는 동생과 통화하며 교과서적인 위로를 하다 가슴이 답답해서 평소보다 안정제를 배로 먹었다. 화도 나고 속상하다. 고작 서로가 이 정도였던 것을, 늘 그걸 잘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 허무할 때가 있다. 다시 또 한 영혼, 나는 그래서 저의 문자를 오래두고 답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더한 경우에도 잘들 견디며 여기까지 오신 것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라, 말씀드리다 화가 났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산다는 일은 사랑하기 싫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일이어서… 기를 쓰고 적당히 또는 차갑게 선을 긋고 살았던 날들이 옳은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래서 그처럼 하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하고 멀리 도망쳤던 길이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내가 더했던 사람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신 주님이라 내가 겪는 마음의 일로 슬퍼할 거 없다. 충분히 나는 잔인하였고 몰인정하게 살았다. 사람이 싫어 교회를 멀리하려 했던 것인데, 다시 또 한 영혼이라니! 저 또한 차마 표현할 수 없이 ‘아픈 사람’이라 한편으론 안타깝고 한편으론 지겹기도 하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그런데 나의 자유하지 못함으로 내가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더욱 주의 마음을 구하는 이유이다.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나는 사랑하기 싫다. 저들의 관심도 신뢰도 역겹다. 언제 그랬냐는 듯 헌신짝보다 못한 신의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 참 어설프고 엉성하다. 그런데 이 일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으니(갈 1:1).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나의 마음은 그러한가? 어제는 너무 슬퍼서 서로가 위로하고 의지하던 때를 증오하였다. 그런 앞가림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너무 일찍 어려서, 그것도 교회 안에서 여럿을 보며 자랐다. 청소년시기를 자라는 동안 친구라는 허무맹랑한 거짓을 그때마다 당하면서 자랐다. 그러는 동안 나 또한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겠으나, 그래서 회피하고 물러나서 외톨이로 살아왔던 것인데…. 사는 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적당한 거리에서의 친절한 타인으로 좋을 때나 좋은 사이로, 그러다 돌아서면 신다버린 헌신짝만도 못한 관계를 선호하였다.

 

이 새벽에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싫다. 저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 일이 싫다. 그런데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나는 과연 그러한가? 정말 나는 저 한 영혼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3:1-3).”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너무 무겁다.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저 도망치고만 싶다. 맞다, 누구 말처럼 적당히, 원칙대로, 저가 와서 개인적인 얘기를 할 때 듣지 말았어야 하고, 저를 위해 마음 쓰며 기도하지도 말았어야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말았어야 한다. 딱 거기까지, 그저 한 눈에 대충 저의 허세와 허풍에 거리를 두고 그만큼의 거리에서 그 정도의 친절로 끝냈어야 한다. 공연히 자꾸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감정이 또는 속상함이 주님 앞에 입을 삐죽거리게 한다. 왜 굳이 나 같이 한심하고 모자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일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나는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이 싫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5-6).” 오히려 내가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모두가 빨리 다 망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운데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 내가 받은 은혜, 이 용서가 너무 커서 나 같은 자가 차마 누구를 미워할 수조차 없는 일이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

 

말씀 앞에 먹먹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울먹하고, 곁을 같이 하는 한 영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마음이 두렵다. 모두가 거짓이어서 언제 또 증오와 갈등으로 버려질지 모르는 일일 텐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아, 말씀이 나를 강권하신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1-2).

 

결국 다시 시편으로 기도를 올리며,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4).

 

오히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5).

 

주가 나를 붙드심으로,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