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8
자서전을 쓰게 한다. 자신의 기억을 따라 어떤 상황을 중심으로 감정에 충실하게 쓰면 된다. 그때 사용되는 어휘 가운데 부정적인 서술이 저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이를 어린아이들에게 자유연상이라 하여 마인드맵을 그리게 한다. 어떤 단어나 상황을 놓고 연상되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실제 이런 글쓰기는 어느 대학의 논술 에세이다. 메타인지라 하여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생각보다 쉬운 것 같지만 열에 아홉은 강한 거부감의 저항을 경험한다. 스스로 아픈 기억이나 상처를 회피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상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음의 여러 상처를 스스로 외면하기도 하고 회피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덮어버리려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망각이라는 세계다. 이를 주께 맡김으로 쉼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이를 자신의 의지로 대체하게 하여 망상의 세계로 이끈다. 대표적으로 피해망상은 자신이 겪은 어려움의 절벽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필사적으로 그 공격의 대상을 찾는다. 한 번 거기에 꽂히면 그것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난공불락의 성이 된다. 정작 그 성에 갇힌 그는 공격의 대상을 무참히 짓밟는다. 과대망상 신체망상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일련의 사람들을 대하면서 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우주의 신비보다 더 복잡하고 기이한 사람의 신비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이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안다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 알면서도 내버려둔다. 또 어떤 이는 일상이 늘 단조롭고 똑같아서 쓸 게 없다고 해서 글의 소재를 만든다 생각하고 자신의 텅 빈 일상을 채워보라고 권하였다. 누구는 너무 번잡스러워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지경인데, 굳이 자신이 안 해도 될 일을 그냥 두지 못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 저는 돌아서면 또 일이다.
다들 저마다의 세계를 자초하며 산다. 늙으신 장모는 일찍이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를 살았던 터라 저장강박이 있다. 하다못해 쓰던 물건이나 마시던 물조차 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것 때문에 아내와 자주 다투지만 음식을 드실 때도 남은 음식을 어쩌지 못해 꾸역꾸역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안타깝다.
우리의 상한 심령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주를 멀리하거나 악용하게 한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한데 오늘 말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하신다. 그럴 수 있는 길은 예수를 덧입는 것이다. 예수를 덧입는 길은 현재 위에 주의 선하심을 덮는 것이다.
나는 요즘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주어진 상황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하시는 데 초점을 맞춘다. 어제는 서로 아픈 몸을 두고 이야기하다, 아픈 것도 일이라고… 나는 이 또한 우리에게 맡기신 기업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주의 선하심을 의뢰하는가? 나름의 방식을 찾는가? 육신의 소욕은 호시탐탐 우릴 노리는 맹수 같다. 원망은 이때 일어나 우릴 덮치려 든다. 누굴 탓할 때 자신이 살 것 같다. 하여 말씀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사랑의 빚 외에는’ 즉 살면서 주의 이름으로가 아닌 것으로 갚을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은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것으로 ‘아무에게든지’ 곧 그 대상은 가려지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7, 10).”
공교롭게도 나의 어려움이 상대의 어려움을 헤아려 알 게 한다. 아이가 지금 겪고 있을 어려움을 아이엄마에게 설명하는 데 있어, 나는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당시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장애아동 하나가 계단에서 구르는 큰 사고가 있었다. 학교는 물론 교육청에서까지 나와 소란을 떨었다. 궁여지책으로 모든 학년의 장애아동을 1층으로 옮기게 했다. 하필 6학년은 15반 여자 반이 하나 1층에 있었다. 나를 비롯해 네 명의 남자아이가 여자 학급에 들어가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학교도, 교육청도, 그 학급의 여자아이들도, 우리 네 명도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 6학년 1년 동안의 일들을 여기에 다 쓸 수는 없다.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본의 아니게 우린 골칫거리가 되었다.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혼자서는 거동을 못하는 아이가 소변을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봐야 한다. 남자 학급에서는 서로 모르는 척 하고 말 텐데, 여자 학급에서의 그 일은 남은 셋의 몫이었다. 어찌 모르게 가리고 소변을 보면 돌아가면서 서로가 그것을 비워다 주었다. 그러다 한 번은 소변이 넘친 것이다. 어린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기기도 한데 슬프기도 했다.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지, 학급이 소란스러워졌고 여자 담임은 민망해하며 학년주임을 불렀고, 학년주임은 온갖 욕을 퍼부어대며 야단을 쳤고, 여자 아이들은 복도로 몰려나가 울거나 웃거나 하며 난장판이 되었다.
어쩌면 사소한 일도 아닌 것이 그렇게 되는 데는 서로의 속수무책이 감정을 충동해서다. 지금 와 생각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걷잡을 수 없는 큰 일이 되어 다음날 학부모들이 몰려와서 저마다의 입장에서 길길이 뛰었다. 졸지에 우리 넷은 ‘처치 곤란한 사물’이 된 것 같았다. 어린 우리의 심정이나 수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땐 서로가 너무 어렸다. 오줌을 넘치게 싼 아이도, 그걸 보다 웃어버린 우리들도, 호들갑을 떨며 복도로 나가 아수라장을 만든 여자아이들도… 나는 그때의 어린 나를 제삼자의 시각으로 다시 본다. 그때의 노여움이 어찌 저절로 사라졌겠나? 고스란히 내 안 어디 깊숙한 무의식의 세계에 스며 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한 아이의 심정을 나는 그리 헤아려 이해하면서 이제는 아이엄마를 위로한다. 다그쳐 속상해할 문제가 아닌 것을 앞서 우린 염려하고 힘들어한다. 이때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나는 나의 어떤 노여웠던 기억이 오늘의 찬송이 되고 그 남은 노여움을 주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을 누린다. 이를 자랑처럼 말하는 것은 나의 어려움이 오히려 어려움으로 힘에 겨워하는 이를 위로하는 힘이 된다. 찬송이 되게 하심은 그럼에도 주를 신뢰하게 하심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 놀라운 신앙의 발판은 사랑을 받은 자의 은택이다. 친구가 아파할 때 아픈 것도 일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해주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가 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는 누군가일 수도 혹은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나의 원수다. 이 지긋지긋한 나의 죄성을 놓고 주 앞에서 씨름하는 일이 주께 기쁨이 된다. 나는 이를 또한 아이엄마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조현임을 인정하는 그 용기로 자신의 나태와 우울과 망상을 이겨내기를. 남을 탓하기보다 그럴 시간에 새로운 일상으로 일상을 만들어내길. ‘하루가 단조로워서 쓸 게 없어요.’ 하는 저에게 우리의 하루는 매순간이 빅뱅이고 온 우주가 동시에 움직이는 엄청난 역사인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저가 누군지, 그러든지 말든지 서로 상관도 없던 우리가 오늘은 서로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즉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오늘 이 사소한 일상 속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매순간 전 우주만물을 흔들어 가득 채우시는 순간순간이다. 내가 저로 마음을 쓴다. 할 말을 놓고 주께 고하며 생각을 하고, 때를 기다리다 어느 순간 주님이 이때다, 하고 마음을 주시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자서전을 써보세요!’ 하고 권하였다.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놀라운, 말도 안 되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랑할 가치도 사랑 받은 자격도 없는 나를 주가 어찌 사랑하셨는지를… 나는 나의 지난날들이 찬송이 되는 것으로 확증한다. 나는 이 시간 수 천 개의 에피소드를 글로 쓸 수 있다. 억울하였고, 원망스러웠고, 분하였고, 속상하였던 사실들이 이제는 누구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데 좋은 소재가 되고 있으니 놀랍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 말씀이 내 것이 되어 감사하다. 나의 여러 약한 것을 자랑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도 이를 말해주고 싶었고, 어찌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모녀’에게도 가까운 훗날 주 앞에서 찬송이 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사랑은 막연하지 않고 애매하지 않다. 사랑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러므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이 모든 것, 나의 노여움과 수치와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모두 더한 모든 것 위에 주의 사랑을 더할 때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곧 우리의 행함이 사랑이 된다. 이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아,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심은 그렇게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
그러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날마다 일어나 새로 옷을 갈아입고 교회로, 일터로, 일상으로 나오듯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그러할 때에 아,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1).
나는 이길 수 없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4).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용기, 이 모든 현실이 복이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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