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전봉석 2024. 3. 14. 03:3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7-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여러 근심과 염려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그런 가운데 나보다 연약한 자를 돌보는 일은 귀하다. 곧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스스로 옳다 여기는 데 함정이 있었다. 누구에게 무얼 권하고 이를 받지 못하는 것에 낙심하거나 실망할 게 없다. 이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오늘 이런저런 모양으로 연결하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저들을 위한 기도였으나 나에게로 온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가끔은 누구를 대하고 사랑하는 데 있어 제풀에 시들하거나 진이 빠질 때가 있다. 너무 애써 나의 마음이 더는 다가가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하여 누구를 사랑함은 나의 사소한 마음뿐이지 정작 저가 그리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내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 하고 그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3).”

 

주가 저를 그리 두시는 일에 대하여 내가 더는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오히려 저의 저 됨으로 나의 나 됨이 주 앞에 바로 서게 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가령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모처럼 긴 대화를 했다. 실은 대화라기보다 저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를 인정할 뿐이다.

 

주께서 싫어하시는 것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그러므로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줌으로 주가 하시는 일에 주목하는 일이다. 고로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6:37-38).”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들을 때 은연중에 그 원인을 분석하려는 생각을 멈춘다. 또한 어떤 일에 실천하지 못하는 저를 두고 뭐라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저나 나나 서로가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섰다. 저도 저 스스로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을,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주가 하신다는 믿음으로, 나는 그저 여기까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고 어느 훗날 저마다의 일로 주 앞에 설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일러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다만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나로 인하여 지치는 것이다. 가령 아이 일로 이야기할 때 나는 그 부모를 생각한다. 아이는 아이라, 아이의 일이 결코 아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저들 또한 자신들 생활을 온전하지 못하면서 아이의 정신교육이니 장래의 일을 두고 아이만 윽박지른다. 그럴 때 아이는 모멸과 수치를 무의식 속으로 감춘다. 그것이 어떤 아이는 주의력결핍으로, 어떤 아이는 감정조절결여로 드러난다. 심지어 지적저하를 가져온다. 실제 응석받이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응석받이 어른이 문제다. 어른아이가 너무 흔한 세상이 되었다.

 

권위를 상실한 시대를 산다. 성경은 일러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은 우선 보이는 것에 치중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견실하다는 것, 주만 바람으로 무던한 것. 당장의 일의 결과로 마음을 조급히 할 게 아니라 주시는 상황 속에서 묵묵히 오늘은 오늘의 일을 행할 뿐, 내일 일은 내일이 하게 두는 것. 그렇게 놓아두었더니, 아픈 아이의 아픈 엄마가 성경공부를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어, 성경’이라 해서 성경의 줄기를 잡아주는 것인데, 먼저는 그런 자리를 결코 가지 않으려 하던 사람이 못 이기는 척 그리하기로 한 것이다. 앞전에는 주체하기 어려운 긴 머리를 잘랐다. 또한 교회 사람들과 우이산으로 가벼운 등산도 갔다.

 

나는 그저 스쳐가듯 권할 뿐이었는데 주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계셨다. 이제 오늘은 아이다. 오전에 오는 한 아이는 너무 어려서 나의 마음이 어렵기도 하다. 아이엄마에게 ‘자서전’을 쓰시라 했는데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것 같다. 나는 저들 부모에게 노골적으로 정신과 약을 좀 먹어야 한다고도 일렀다. 마음도 부러지고 다칠 수 있다. 배탈이 나고 감기에 걸리듯 마음도 그러는 것을 그저 믿음으로, 신앙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릇되다. 상한 심령을 알고 주 앞에 고하려면 ‘상처 받을 용기도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 

 

그러할 때 우린 저마다 ‘상처 받은 치유자’로 주가 보내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이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곧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 스스로의 마음의 병도 인정할 수 있게 한다. 흔히 마음의 병을 여느 병과 달리 여겨 병원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데, 폴트루니에의 말처럼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

 

우리의 심령이 상했다는 것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러므로 나의 나 됨을 인정하는 일,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졌는데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거 우긴다면 어리석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부러지고 깨진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평소 근력을 길러야 한다. 이 또한 자신을 살펴 막힌 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허물 수 있는 용기도 길러야 한다. 마음도 몸과 같이 물리치료가 필요하다. 

 

아이엄마에게 자서전을 써보시라, 한 것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마주하길 바라서다.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저 자신을 진술하다보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부정적인 생각을 마주할 수 있다. 미처 몰랐던 미움과 증오와 남을 탓하는 원망이 실은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이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게 쉬울 것 같지만 실은 그러지 못하는 데서 마음은 상하고 부러지고 깨져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이와 같은 마음으로라면 무엇이든지 주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근력으로 든든히 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쪽 아이엄마가 성경공부를 마지못해서라도 하기로 했다는 데에 깊은 감사가 나왔다. 설령 하다 또 그만둔다 해도 시작이 반이다. 주가 그리 두지 아니하실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우리 주의 죽으심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고로 나는 내 곁에 두시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주의 권능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내가 저보다 나은 게 있어서도 아니고, 나의 경험으로도 아니다. 다만 주를 인정함으로 안 된다는 말을 피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하여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는 내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저들보다 못한 나를 오늘 이 자리에 두시는 이를 믿어서이다. 주가 하실 것을, 그리하여 나는 다만 오늘 여기에 있을 뿐 내 입의 말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서 주가 행하시는 것을 인정한다. 곧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그럴 자격도 가치도 없는 나를 그렇지 않다 하시는 이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권하되 듣지 못하는 이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그리 두심일 테니, 나는 다만 말함으로 나의 말이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을 안다. 나의 기도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의 소망이 내 것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1-13).”

 

이는 마치 내가 저보다 나은 줄 알고 그리 행하는 일이면 이보다 더 헛된 일도 없다. 오늘 나로 저보다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으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14).”

 

이 원리 안에서 오늘 나의 행함이 겸손하여진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8-19).” 그러한 것을 마치 내가 뭐나 된 줄 알고 내가 어떻게 하려던 것을 회개한다. 그러한 마음으로 누구를 비판하던 것에 용서를 구한다. 결국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이처럼 매일 아침 나를 말씀에 꿇리시는 것이 복이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그리하여 나로 기도하게 하시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5).

 

이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