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5-6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새벽의 은총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 앞서 새벽예배를 나가는 친구에게 나는 축복하였다. 아침은 하루의 첫 시간으로 하루를 주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 복이 있다. 아침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여 하루를 사는 것이 귀하다. 고로,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뜻을 같이 하고 같은 곳을 향해 가는 동행은 즐겁다. 그로 알게 된 모녀의 이야기는 자주 서로의 대화에 등장한다. 4월에 새로 시작하는 성경공부에 아이엄마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못하겠다고 했단다. 나는 그 마음이 열댓 번은 바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우울과 불안을 가진 사람은 변덕이 아니라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이다. 같이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자신이 없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몸부림이다. 그리 이해하고 인내를 가지고 계속 권면하기를 바랐다.
‘이제’ 우리는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 또한 인내와 위로로 서로를 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렇게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같은 화두로 같은 기도제목을 가진다. 즉 ‘한마음과 한 입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는 곧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이유이고 목적이다(롬 15:5-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의 찬송은 곧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시편은,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15:11).
우리가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를 즐거워하는 일, 그것으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하고 오늘 바울은 일깨운다. 믿음이 강하다 함은 약함을 전제로 이를 돕기 위함이다. 가령 나의 유년은 노여움이 가득한데 그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셨다. 이는 여전히 그것으로 무력감에 빠진 영혼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기꺼이 저들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정신과 약을 먹고 자신을 인정하는 만큼 보다 강하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권한다.
아이가 왔다. 원고지 쓰는 법과 글쓰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설명했다. 우려했던 것보다 아이는 덜 산만하였고 인내심도 있었다. 보면 엄마가 같이 있을 때의 아이와 혼자 있을 때의 아이가 다르다. 엄마의 부산스러움과 아빠의 무책임함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저들로부터 아이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홈스쿨링이랍시고 같이 붙어 있으니 그것이 독이 된다. 이를 아무리 말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엄마의 불안이 아이를 집착하고, 아빠의 무기력함이 아이를 무책임하게 다루고 있었다.
우리가 강함은 약함을 인정할 때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온다는 말씀에 아멘, 한다. 아이아빠의 무력증을 이해한다. 그런데 스스로의 방어기제가 ‘어릴 때 내가…, 우리 엄마는…’ 하는 식으로 자꾸 옛날 일을 이유로 든다. 그래서 당뇨, 고혈압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체구에 거의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게임과 먹고 늘어져 있는 것을 정당화한다. 아이의 말투에서 ‘아빠도 뭐…’ 하는 말로 자신을 그리 내버려두고 허용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나는 이를 염려하는데 저들은 별 거 아닌 듯 듣고 만다.
‘모녀 이야기’에서도 저들의 문제는 서로 너무 밀착관계다. 다 큰 아이인데도 둘이 같이 방을 쓴다. 각자의 핸드폰을 부여잡고 뒹군다. 둘을 좀 분리했으면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강하다는 것은 저들의 문제를 같이 짊어지는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운데 동네 전체가 같이한다는 말처럼. 우리 주님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곧 우리의 섬김은 관심과 사랑으로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친구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언제 누구 일로 이와 같이 마음을 같이한 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턴가 친구는 누구 일을 묻는다. 자신이 무얼 할 수 있겠나? 하고 생각한다. 이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요즘 보면 저로 인해 내가 게으를 수 없다. 누구의 일을 물을 때 나는 무얼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 같아서 말이다. 성경을 알기 원하고 예수를 사랑하면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사람만 붙이신다. 또 누가 주의력결핍인 아이 하나를 받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다른 한 아이는 홍콩에 살던 아이인데 한글이 서툴러서 학교에 적응을 못한다며 가르칠 수 있겠나? 하고 물어왔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그리 중간에서 묻는 이에게 말했다. 아이의 일은 그 부모와 같이 하길 바란다고 조건을 붙였다. 아이가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그 부모의 영향이 크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두고 아이만 받을 수는 없다. 이번에도 아이의 글쓰기에 아이엄마의 자기직면을 자서전으로 같이 쓰게 하였는데 난색을 표한다. 그러니 아이 문제는 난제다. 나와 한두 시간 뭘 할 수 있겠나? 아이엄마는 자서전을 쓰려는 의지가 없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우리는 누구나 어른아이다. 그 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산다. 스스로도 자기 시간을 함부로 쓰고 게을러서 온갖 기저질환을 가지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아이를 훈계하자니 성질부터난다. 무얼 가르치다 기어이 아이를 울린다. 그래놓고 야단을 친다. 어릴 때 아이는 통제가 가능한 것 같으나 곧 사춘기가 오고 더 자라 성인이 되면 자기 같은 어른이 하나 더 생길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너가 하나 더 생겨! 괜찮아? 하고 모질게 물었다. 그러면 자기 아이는 결코 그럴 리 없다면서 화를 낸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함으로 주가 기뻐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우리가 같이 누구 일로 마음을 쓰고 신경을 쓰는 것은 말씀으로 인함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이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나는 아이가 열심히 하고 애쓰면 다음에 무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친구는 아이가 열심히 하면 두어 달에 한 번씩 인천으로 데려와 바람을 쐬겠다고 하였다. 다음에 중국인거리에 놀러가자? 월미도 가자? 하고 저를 어르고 달래는 것은 저의 열심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굳이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지려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념으로 주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으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것으로 누군가의 일을 서로 나눠지는 것일 텐데,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그래서도 우리는 말씀을 붙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성경을 나누고 서로 묻고 답하는 일이 유익하다. 알만하다 싶어서 그리 권해도 싫어하는 무리가 동료였다. 희한하지? 좀 안다, 하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어떤 말도 듣지를 않는다. 나는 어제도 아이를 생각해서는 맡아야 하나 아이엄마를 보면 해봐야 뭐하겠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울의 또 다른 증상은 불안이다. 너무 산만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안 하면 큰일 날 것처럼 하여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다.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일을 들쑤시고 다니느라 이도저도 아닌 일로 피로하다. 이는,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말씀으로 우리가 이 시대를 읽는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하여 나는 성경으로 유도하며 글쓰기를 이끌려 하고 저는 단지 학과목으로 생각하여 접근한다. 그럴 거면 여러 학원이나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전문가를 찾아가라고 권해도… 말의 의중을 모르는 것인지.
누가 소개하는 어느 아이들을 두고 나는 답을 구하며 주께 묻고 있다. 모녀의 글을 읽으며 저들과 일주일에 한 번은 통화를 해야 하는데, 특히 아이와의 통화는 어렵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오늘 말씀은 말보다 덕을 세우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 성경으로 말씀으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 나는 이제 이를 전제로 아이를 가르치고 누구를 권면한다. 그러기 위해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 그렇게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5-6).” 이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내가 주께 묻는 답을 위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이때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내가 뭐라고 아이와 아이 부모를 염두에 두고 주의 뜻을 구할 수 있겠나? 늘 보면 아이보다 어른이 문제다. 완고하여 자기주장으로 산다. 모두가 길가 밭이다. 더러는 돌 밭이고 가시떨기 밭이다. 그러니 좋은 땅을 일구어야 하는데, 그 마음을 갈아엎고 솎아내지 않으면 악순환은 거듭될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 바라는 일,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5:1, 3).
그렇게 나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7).
그러할 때에야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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