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24. 3. 16. 04:5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 16:16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서로 안부를 묻고 그 사정을 살피는 일에 대하여,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하는 말씀으로 이르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개인적으로 그러한 생활을 바탕으로 교회가 하나 됨을 알게 한다. 우리의 섬김은 서로를 돌아보는 데서부터다.

 

오늘 바울은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뵈뵈를 천거하며 글을 시작한다. 뵈뵈는 고린도 겐그레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이다. 그녀를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한다. 직분을 감당하는 데 있어 단정하고 순결하며, 깨끗한 양심을 가진 올바른 신앙을 실천하는 데 있다. 곧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8-9).” 이에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 하여 집사로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13).”

 

교회 안의 필수적으로 재원이 되는 인물군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 구성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그러므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신 말씀을 토대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심을 염두에 둔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는 데서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고 방점을 찍듯이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고 어엿하다. 막연하거나 애매하지 않다.

 

우리가 주의 쓰임에 합당하다는 것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우리가 피할 것은 피하고 쟁취할 것은 쟁취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다. 이것으로 “영생을 취하라.”고 이르신다. 곧 오늘 내가 여기에, 이 일에 쓰심을 받는 것이니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나타내는 일이다.

 

누구를 두고 생각하고 저를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안부를 묻고 서로의 근황을 살펴 기도의 줄기를 놓지 않는 것으로 서로는 연결되어져 간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이때에 우리 개개인은 교회이면서 동시에 교회와 교회로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을 이룬다. 그런 가운데 세심한 배려와 관심은 같은 길 가는 자들로서의 의무이면서 권리가 된다. 보면 늘 자기 요구만 구하는 경우도 있다. 한번쯤은 좀 어떠한가? 하고 이쪽 사정도 물을 법한데, 늘 보면 자기 이야기로 점철되어 얼마 지나고 다시 이야기할 때도 또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이는 남의 문제가 나의 문제를 이기게 하지 못해서이다. 즉 자신의 문제에만 함몰되었을 때 실상은 그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도 남의 문제로 씨름할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본다. 흔히 남의 문제를 떠안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자기문제로도 감당이 안 된다. 이 또한 습관적이어서 항상 보면 늘 자기 이야기로 가득한 사람은 누구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다. 이때에 문제는 주가 나를 돌보시고 함께 하심이 우연이란 익명의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 34: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이러한 일들이 실은 ‘우연이라는 하나님의 익명의 수단’을 통해 필연적으로 역사하고 계셨다. ‘어쩌다’ 그리 되는 일은 없다. 모든 일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이를 알기 위해 우리가 남의 일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관심이 실은 자신의 문제로부터 승리하게 한다. 일정하게 나는 누구와 통화를 한다. 안부를 묻고 서로의 근황을 살핀다. 그러다보면 알겠지만 주거니 받거니 각자의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때의 나의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를 돕는 데서 실타래가 풀리는 것을 본다. 정작 남의 일로 신경 쓰고 마음을 기울여 주께 기도하거나 할 말을 받아 전하게 되는데, 그게 실은 나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된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누굴 위해 무엇을 행한다 함은 곧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다. 이는 다시 주를 위하는 일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그러하기도 하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6-18).” 이와 같이 나는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한다. 저가 오거나 자기 이야기를 한다. 들을 때 나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떤 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다보면 주가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고 우린 생각하지만 실제 그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왜’ 혹은 ‘무엇을’에 대한 답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그러할 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

 

서로가 돈독한 신뢰를 갖는 것은 사소한 호기심으로 저의 일에 관심을 두는 데서였다. 그럴 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요즘은 다들 자기 세계관이 강해서 누가 뭐라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래놓고 혼자 외로워하다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을 열지 않으면서 자신을 몰라준다고 하는 소리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누구라도 저를 조심하게 되고 그렇게 벌어진 관계는 가까이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기껏 좋은 사이, 가까운 사람인 줄 알았다가 한순간에 멀어지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장 먼 사이도 있다. 우리는 엄연한 동역자이다. 서로가 같이 가는 순례자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와 같이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서로가 고난을 함께 하는 사이는 드물다. 어려울 때 곁에 있는 사이가 많지 않다. 좋을 때야 누구라도 좋은 사이처럼 보이지만 정작 남의 짐을 대신 지려하는 사이는 적다. 그래서도 서로가 가까이 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우리가 이 마지막 때를 살면서 서로가 단절되어 살아간다는 일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3-14).” 서로에게 격려하고 힘이 되는 사이가 필요하다. 정작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곧 뭐라 나무랄 수 없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는 비극적이다. 좋은 말만 하는 사이는 ‘친절한 타인’일 뿐이다. 성도는 서로에게 그러할 수 없다.

 

우리는 혈연관계보다 짙은 공동체이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곧 우리는 서로가 하나의 교회다. 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7-19).”

 

동생의 일은 여러모로 주가 어찌 다루실지 주의를 모으게 한다. 우연처럼 기독교법조인연합단체와 연결되어 항소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함께 기도하며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어떤 이의 남모를 일은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게 한다. 어찌해야 할까, 하고 묻고 생각하기를 주께 내어놓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고로 서로의 관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굳은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우리 신앙의 유산은 혈과 육의 관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의 굳은 의지가 모두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5-16).”

 

나는 오늘 말씀으로 새삼 누구의 안부를 묻고 문안함이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인 것을 되새기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내 곁의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안다. 이에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서로의 모습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 곧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 이와 같은 확신이 나의 믿음이 된다. 그러므로 주께 구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6:2).

 

누구에게도 쉬 알리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4).

 

주를 구한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