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전봉석 2024. 3. 27. 04:43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시 17:6

 

 

어느 순간 하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놓고 믿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의지하면 좋을 텐데 곁가지로 여러 기도가 붙으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해주셨으면 하는 일만 늘고, 자신의 요구로 가득 찬 기도는 되는 일도 없고 믿음도 복잡해진다. ‘~을 위해’, ‘~의 하나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 권리를 절제하고 의무를 우선하는 게 중요해진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필요하나 해야 할 일을 하려 하는 게 더욱 앞서야 한다. 예수님은 그러하셨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어떨 때는 모두가 귀찮고 마다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가 오늘 갈까요? 내일 갈까요? 하고 문자를 했는데 나는 그저 내일, 하고 답을 했다. 만사가 귀찮기도 하고 몸은 어려워서 공연히 아무 것도 마음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나는 과연 누구에게 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묻게 하시는 오늘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이는 자신에 대해 확신이 있을 때 말할 수 있다.

 

이 확신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이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이에 나의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면서 정작 나 자신의 뜻을 우선 하려는 것은 아닐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딸애가 읽어보라며 어느 젊은 목사님의 책을 한 권 주었다. 저가 어디에 묵상글을 쓰는데 3년 만에 구독자가 9만 명이 되었다고 했다. 저의 책 프롤로그에 온라인 상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앞부분을 몇 단락 읽다 옆으로 밀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히브리서>를 읽었다. 딸애의 의도는 알겠는데, 나는 내 글이 재미없기를 바란다. 성경구절만 많고 나의 이야기는 간간히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한 정도이면 족하다. 구독자 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는 주일 설교를 유튜브로 찍고 올려서 여러 사람이 듣게 하면 어떤가? 하고 내게 권하였다. 어차피 줌으로 들어와 예배드리는 이도 있으니 이를 같이 녹화하였다가 그러든가, 직접 송출하고 녹화된 것을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문득 뭐라 대답할까 하다, 나는 잊히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언제부턴가 우린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고, 주객이 전도되면서 속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유명세가 성공여부가 되고 그것에 따라 말씀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을 삼기도 한다. 글쎄, 그래 본 적이 없어서 그러려는 의지도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한 영혼으로도 힘에 부친다. 내가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도 힘에 벅차서,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에 민감한 육신을 이끌고 사는 나는 나의 연약함도 일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확신으로 족하다. 그 확신으로 ‘나를 본 받으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을 확신하고 무엇으로 그 확신을 뒷받침 하고 살고 있는지? 정작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 부수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느라 여념이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인지, 당장 나의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한 것인지… 주객이 전도되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우선인지, 그 말씀을 전하는 나의 인지도가 우선인지. 서로 헷갈리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을 경계한다. 가령 글을 잘 봤다고 답글을 남기면 슬그머니 지운다. 행여 나는 내가 드러날까 두려워한다.

 

오히려 나의 취약점이 드러나 누가 나의 부족함에도 주가 함께 하시는 데서 주안점을 두고 읽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 글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말씀을 더 되새겨 주를 생각하는 의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성경구절을 많아 찾는다. 설교 중에는 예화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삼간다. 누구의 말에 나의 경험을 빗대어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 신앙의 취약점,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주의 도우심이 간절하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하여 딸애의 어떤 권유나 친구의 제안도 그저 고마우나 시도할 마음은 없다. 이처럼 어디에 글을 올리고, 그러다 적잖이 나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으로도 조심스럽다. 나의 특별한 경험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다. 글을 잘 쓰네, 좋으네, 하는 따위의 평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함정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거의 평생을 나는 ‘주목 받는 생이 되고 싶었다.’ 여기저기 공모전에 글을 보내기도 하고 누가 어찌 읽고 평을 하나하고 여러 모임도 했었다. 그러다 주를 만나고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서로 다를 바 없는, 그래서도 서로를 위하여야 하는, 그와 같은 사명이 주어졌음을 알았다. 곧 나는 하나씩밖에 안 된다는 한계를 사랑한다. 어떤 이의 일을 두고, 그 한 사람의 일로도 마음은 온통 연애하는 사람 같이 속을 끓인다. 하물며 익명의 수십 수백의 사람을 상대할 능력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담임 목사가 성도 하나하나 그 이름과 가족을 알고, 기억하고, 저를 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적합하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백 명 이상이 넘어가고 그 이상이 되면 아무래도 무작위로 상대하는 일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된다.

 

나의 사는 이야기, 그 보잘것없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려지기를 바란다. 이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하여 나의 하루 일과는 가급적이면 늘 같은 동선을 따라 일정하게 움직인다. 새로 사람이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누구는 잊히고, 누구는 합력하여 여전히 같이 한다.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하루는 내 몸 하나 아픈 일로 씨름할 때도 있다. 어떤 날은 누구 하나 때문에 온통 마음이 쓰일 때도 있다. 나의 이 부족함을 감사한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매일 다른 일을 부과하신다는 것을 안다. 어제는 전화로 성경공부하는 친구가 다짜고짜 성경 어디를 찾게 하고 그 뜻을 물었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기보다 문장의 앞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성경은 구어체이고, 두괄식이면서 나열방식이다. 투덜거리듯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 저에게 음미하는 맛이 있다, 오래 씹으라고 권하였다. 문장이나 해석을 운운하는 것에 너무 개의치 않는다. 문법적으로 틀린 어린아이의 글도 그 의미를 이해하면 옅은 미소로 공감할 수 있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글이 아니다. 동의를 구하거나 설득을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성경은 선포다.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다.

 

우리의 독해능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게 아니다. 이해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알린다. 어떠어떠한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체로 승부한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여자와 남자를 서로 우위에 놓고 논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고로 우리는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것이다.

 

가령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 여기서 핵심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심은 그에 따르는 홀가분한 것이지, ‘따르라’는 데 필요한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곧 저는 말씀을 조건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친구는 안수집사는 얼마, 장로는 얼마, 하는 식으로 교회에서 암묵적이고 공공연하게 돈을 두고 직분을 받는 일에 마음을 어려워했다. 성경을 물을 때도 ‘구원의 조건’이나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우선하며 자주 의문을 제기한다. 어제도 무슨 설명을 하다, 네가 그 어떤 고귀한 일을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고 못 가고, 구원을 받고 못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오히려 이미 그럴 자인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어찌 감히 나서서 나를 본받으라 하겠나? 앞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하는 부분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하여 우리의 믿음은 단순하다. 한 마디로는 하나님을 바라기만 하면 된다. 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조악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참 안 됐다. 저들의 믿음은 복잡하고 그 신앙은 널뛰듯 한다. 생활은 감정적이며 즉흥적이고 기분에 따라 잘했다 못했다 한다.

 

품위를 잃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갖지 못해서이다. 믿음이 여물지 않아서도 그렇고 혹시나 믿음이 아닌 자기 신념으로 하여서 그렇기도 하다. 자주 되새기지만 자기 신념은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다른 하나님을 준비한다. 사람은 여러 모양이나 믿음은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여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각자 저마다의 처지는 복잡할 수 있고, 그 상황은 알겠는데 그때마다 바라는 하나님이 다른 것은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서 그렇다.

 

자신의 필요에 필요한 하나님을 선호하는 조악한 신앙의 사람들. 그러니 각자 저마다의 하나님으로 수천수만의 하나님을 재생산하는 격이다. 그러나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하여 나는 점점 단순해진다. 못해도 그만 잘해도 그만, 어려워도 그만 쉬워도 그만,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삼하 22:33).”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 59:9).

 

다른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럼 됐지 뭐? 뭘 더? 너무 지나치게 잘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안 그러면 순간에 훅, 간다. 말세에 믿음을 보시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어떤 요구가 응답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1).

 

우리가 주께 아뢰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 그렇다면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3).

 

그럴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으로 됐다. 하나님이 전부다. 천국도 지옥도, 성공도 실패도, 만족도 불만족도… 우리의 결론은 하나님이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리하여 주가 행하심을.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3).

 

나는 다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