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전봉석 2024. 3. 29. 04:41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사람이 나고 자라 어른이 되었다가 죽기까지, 그때마다 성장통 같은 갈등을 겪는다. 서로 다른 두 마음은 언제나 우릴 고민하게 한다. 매순간이 선택의 시간이다. 이에 답은 하나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우리가 선택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계셨다. 이를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운율과 진술로 노래하듯 사랑을 풀어주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가만히 소리 내어 읽거나 들으면 그것으로 나의 사랑이 어떠한가, 짐작이 간다. 애써 아이를 또는 누구를 사랑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이 없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의 것으로 권리에 치우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랑은 공의의 것으로 의무를 따른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3).” 이에 사랑은 곧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사랑은 사람이 사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는다. 서로 사랑하다 병이 들고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러므로 사랑은 이것이니,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 1:6).”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충만함으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결국은 사랑이었다. 아이가 홈스쿨링을 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어쩌다 나는 아이와 글쓰기를 하게 되었고, 한 달의 시간을 점검하게 하는 글을 써보게 하였다. 원인은 어떤 아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사소한 일인 것 같으나 아이 입장에서는 괴로웠을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수없이 그와 같은 상대를 마주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회피하고 도망치듯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겠나? 하는 부분을 묻고 스스로 답해보기를 바랐다. 아이란 단순하여서 그저 잘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학교에 안 가는 것을 옳다는 주장이다.

 

일부러 아이엄마를 곁에 두고 그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 저들의 문제도 회피와 방임에 있다.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즉흥적인지… 처음에는 아이를 장애인으로 낙인찍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다 지금은 또 장애인등급을 받는 절차에서 무슨 서류가 부족하여 반려될까하고 걱정한다. 누구는 여태 이렇다, 하고 주장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저렇다, 하고 핏대를 세워 주장한다. 모든 게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사랑한다. 아이를 사랑해서 하는 소리 같으면서도 실은 다 자신들이 편하자고 하는 소리만 같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런데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나는 이제 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랑을 요구한다.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주의 권능으로 하지 않으면 저 한 영혼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얼마나 왜곡되고 와해된 사랑으로 사랑이라 하는지… 스스로도 안다. 자신의 병이 무엇이고, 어떤 게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누구는 자기 방에 갇혀 자기에게 허락하신 세계를 회피하면서 동굴 잠을 잔다. 어디 선교지에서 도움을 청해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런데 아이가 따라가겠다고 한다. 실은 아빠와 며칠 있는 게 아이로서는 두려운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는 선교지에서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신랑도 같이 가자고 권하였던 모양이다. 느닷없이 ‘어떤 촉’이 오는데 그럴 땐 꼭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더라, 하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저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 사람들 같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도 어렵다. 각자의 생각과 판단으로 자식의 일도 건사하는 것이니 내가 자꾸 뭐라 하는 게 참견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수업에 앞서 아이와 같이 아이엄마도 아이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하는 말을 종종 하는데… 아이의 생각도 그때마다 정직한 것은 아니다. 우린 저마다 자기 사랑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생각과 해석을 본능적으로 한다.

 

우리가 사랑의 종교를 자처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도 사랑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데 있어 자기 사랑이 항상 걸림이 된다.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그 자신을 오늘에 두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함이다. 이를 알기 때문에 주를 먼저 사랑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그러한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하실 때 주어진 상황에서 더러는 힘에 겨워 낙심이 될 일에서도 오래 참음을 묻는다.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그리하여 평안함으로 주를 찬송하고 있는지?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곧 자기 사랑에 치우쳐 스스로의 결정을 옳다고 하고 이에 무례히 행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우선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자칫 사랑의 총구가 겨누어져 남을 미워하고 악을 도모할 때 사용되어 성내곤 하지 않는지?

 

심지어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한데 불의함을 자기합리화로 대체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러나 말씀을 재해석하여 자기 유리한 것으로 둔갑시키면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럴 수가 없다. 참지 못하고 욱, 할 때마다 아이를 윽박지른다. 아이는 자주 아빠에 대해 무섭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빠를 변호한다. 좋은데 싫다. 그러니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한다. 주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것을 믿지 못함으로 자신을 우선한다. 믿을 수 없는 만큼 스스로들 해결하려 든다.

 

드러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본인들도 아는 것 같다. 6월5일 전까지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메모해두었다. 나는 도대체 서로의 사랑이 어디서 어그러진 것인지, 이를 스스로가 찾아내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가 이 생활에 길들여지기 전에, 저마다 지금의 안일함과 나태에 길들여져서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을 일삼는 게 아닐까? 오늘 말씀은 다시금 뒤집어엎는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곧 우리는 사랑이었다. 사랑으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비인격적인 것을 사랑하기까지 사랑한다. 동물을 끼고돌고, 각종 자기 취향과 선호하는 것을 사랑한다며 본래의 사랑을 왜곡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하시지만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이에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러나 그의 사랑은 여전하시다. 우리가 우리로 사는 동안 우리 스스로를 우선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마치 지금의 것을 전부로 안다. 영원을 사모하고 믿는다면서 임시적이고 말초적인 것에 매인다. 그러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결국은 잃고 난 뒤에 후회뿐이다. 나이 들고 몸져누워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에 우린 무엇으로 소망할 것인가?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이를 실감할 수 없을 때에 우리는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랑을 꿈꾼다. 다른 사랑,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다른 사랑이 자리한다. 이를 인정할 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러니 사랑만큼 애매한 것도 없다. 사랑한다, 할 때 이것이 관념적으로야 그렇다니까 그런가 하는데, 실제가 되면 달라진다. 사랑은 행위다. 행함으로 드러난다. 추상적인 게 아니다. 막연한 감정으로 시작하기는 하나 구체적인 삶으로 증거가 된다.

 

당장은 애매하여,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희미하고 막연한 것을 실재처럼 확신하고 실상으로 섬김은 믿음으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손에 닿고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급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로써 내 자신도 자식도 사랑을 한다.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상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너무 아픈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잃고도 원망하지 않고 저를 인정하게 한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저의 이 끔찍하고 잔인하며 아름다운 사랑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더는 희망이 없는데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 사랑,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이를 인정하는 곳에서,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8).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9-10).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