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5-56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21:5-6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이보다 더 비극적일까?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0-41).” 하시는 데서 새 힘을 얻는다.
부활의 삶은 복음의 삶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나로 이처럼 구원을 사모하여 부활을 살게 하심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일이 비극적인 것 같으나 실은 구원의 영광으로,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더는 세상을 바라고 육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은 성경의 예언으로 성취되었고,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예전의 내가 아닌, 더는 그때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은 앞으로의 영생을 누리려 함이다.
이에 오늘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4-8).” 자신에게까지 닿은 이 부활의 은혜에 감사한다. 우리 삶에 부활의 역사가 없다면 그 신앙은 여전히 애매하여서 주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의 삶으로, 그에 따른 사연으로 안타까워하다가도 부디 그것으로 주를 영접하기를.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한다. 만일 저가 이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그 삶이 여전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막연하여서 부끄러울 것이다. 보면 열에 아홉은 전에 믿었던 자이다. 어떻게 저들의 마음이 안 믿은 자의 마음보다 완고하고 어지러운가 하여 답답하기만 하다. 차라리 몰랐으면 몰랐음으로 새로운 터인데, 스스로도 안다 하고 아는 것으로 주를 더욱 온전히 바랄 수 없는 것이었으니….
안 믿는 형님 내외의 일로 마음이 어려운 친구에게 나는 주의 뜻을 전하였다. 더욱이 또 환갑이라 어느새 우리가 이 땅에서의 나이 또한 적잖은데… 예전에 같이 춘천으로, 그 공지천 어디에서 술에 취해 눈길을 걷다 뒤엉겨서 웃고 울던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땐 형님도 연대의과 수련의로 한참 바쁠 때였는데도 무슨 일로 우리와 같이 동행하였던 것이다. 까마득한 기억 저편의 일이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손에 잡힐 듯 선한데, 영생을 알고부터 동생인 친구는 더욱 형님을 위해 기도한다. 부친이 살아계셨으나 부재와 다를 바 없는 그 자리를 형님이 대신하였던 것이니….
주의 부활은 화해와 용서를 품고 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이 단순하고 확실한 일을 그처럼 불가능한 일로 여기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또 누가 고백하기를 그 언니와 동생이 물론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구원의 확신도 부활의 기쁨도 잃고 사느라 전전긍긍하는 일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부활 주일 아침 저마다의 경건한 마음으로 주를 찬미하겠으나 참된 기쁨은 우리의 영광을 놓고 영원한 날들을 소망하는 일이었다. 곧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복음은 이를 목격한 이들의 산 증거 위에 선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께 바라며 감사하는 이 모든 일에서 부활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거여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2-13).” 하면서 이어지는 설교가 귀하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4-15).”
살았으나 사는 게 아니고, 열심을 다한다고 하나 그것이 모두 헛될 것이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6-19).” 그러니 우리의 오늘이 값지고 소중하여 살만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순전히 부활의 영이 우리로 영생을 소망하여 오늘로 영생을 살게 하심이었다.
누구를 위로하다 천국이 이미 우리의 삶에 역사되고 있다는 것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산다는 것은 요셉이 앞서 살았을, 다윗이 그처럼 찬송과 영광을 주께 올리며 좋아하였던 바로 그 삶을 사는 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에 오늘이 어떠하든지, 지난날이 어떠했든지, 앞으로의 날들이 어떠할 것이든지, 우리로 주 안에서 찬송이 되고 영광의 기쁨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5:10, 4:25).”
이 놀라운, 기이하고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에 오늘의 나로 주의 말씀을 전하고, 상한 심령을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하심이 놀랍고도 감사하다.
아주 가끔 내가 누구의 일로 마음 쓰다, 힘에 겨워 주의 이름을 부르다, 저에게 주의 위로와 말씀을 전하다,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놀라워서 이것이 누구인가? 하고 낯설 때가 있다. 한참을 주를 멀리하며 살던 때에 나는 세상의 여러 즐거움을 찾고자 하여 육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저 멀리 더욱 더 주가 보지 못하실 곳으로 숨고 또 숨어서 살겠노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문학을 꿈꾸고 소설 같은 삶을 희구하며 살았다. 가만히 어느 암자에 앉아 사는 데 있어서의 허무와 공허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다시 주의 강권하심에 붙들려 신대원을 하고 목사로 주의 길을 가겠다고 할 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선생은 그의 친구에게까지 연락하여 나를 설득하라고 일렀다. 누가 전화를 하였는데 본인을 무어라 해야 할지, 목사라고도 하다 스님이라고도 하였다가 그저 한 중생이라 하면서 저도 같은 길을 돌아서 거기까지 이른 것을 한참동안 말해주기도 했었다. 부친과 조부가 모두 목사님으로 자신은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의당 주의 길을 따라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문학을 하고 문화부기자로 있다 뒤늦게 신학을 하고 저 역시 잠깐 목회를 하였는데, 어떤 깨달음(?)으로 당시 저는 스스로 고성 어디 깊은 산속에 암자를 짓고 속세의 모든 시름을 씻고 교회도 아니고 절도 아니면서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삶과 죽음을 설파하고 있다고 하였다.
문득 그렇게까지 나의 이 길을 가로막았던 이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 15:28-30).” 오늘 이와 같은 바울의 설교를 들으며 부활의 주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은 나로 다시 살게 하신 이를 알기 때문이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4-38).”
그때마다 내가 겪었던 일들 가운데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희한하였다 싶을 정도로 오늘의 나로 세우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죄의 정죄와 주의 은혜가 충돌하며 나 같은 죄인 하나를 살리시기까지 치열하였는가를 알 것 같다. 그것으로 오늘 내 곁의 어려움을, 저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삶으로의 죄였다. 이에 더는 양보할 수 없으니,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0-41).” 서로 다른 하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곧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이와 같은 말씀 하나하나가 나의 삶 가운데 더불어 그 실체를 드러내고는 했었던 것이다. 신기하다 싶은 것이 그때에는 나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나의 소망을 누가 묻는다면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3-24).”
문득 어느 암자에 들어앉아 여전히 속세의 덧없음을 운운하며 풀어져 먼지가 되기를 기다리던 그 사람은 어찌 살고 있는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러므로 나는 더욱 확신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러므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3).” 이 놀라운 확신이 부활을 살게 하였다. 부활이 나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아,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5-56).”
죽음으로 끝이 아닌 것을,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7-58).”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가 살아서 나를 살게 하신다. 이는,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시 21:3-4).
그러므로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5-6,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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