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전봉석 2024. 3. 30. 04:04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 14:9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 20:4

 

 

우리가 성경을 두고 말씀에 의지하여 말함이 예언이다. 곧 있을 이 땅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이를 위한 우리의 소망과 그의 뜻에 합한 자로 준비하는 삶에 대하여… 그러므로 사랑으로 은사를 구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데서 우리는 선회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13:1-2).” 그러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고 사랑보다 두려운 것도 없다.

 

이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오늘 우리에게 더하신 이 자유는 사랑으로 선회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죄로 어디까지 멀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고, 커졌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보다 더 넓고, 높고, 깊고, 길다. 우리를 능히 용서하시고 또 사랑으로 감싸 안으신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저의 지능은 무엇 때문에 멈추어진 것일까요? 하고 아이가 물었다. 스스로 밝히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엄마가 의연하게, 자신을 먼저 돌보고 바로 서기를 바라였다. 앞서는 염려와 걱정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불안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하고, 이 일 저 일 마구잡이로 덤벼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하게 하려는지 알지 못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마음이 불안으로 조바심친다. 뭐라 이를 때 나는 속으로 주께 기도한다. 저의 말을 들을 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것과 같다.

 

소위 전방위적으로 에워쌈을 당한 것처럼 저기 이고 지고 눌려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친정의 우여곡절과 각자의 흔들리는 영혼들을 감당할 길 없고, 시댁은 시댁대로 하나님을 알면서도 온전히 바라지 못함으로 취하는 언사가 가히 폭력적이다. 그러니 신랑은 신랑대로 멋대로 굴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하는 가운데, 자신 또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어 불안이 초조를, 초조함이 우울을, 우울함이 여러 감정의 기복을 동시에 뒤섞고 있었다.

 

차마 저들의 말을 말로 옮겨올 수 없으나 문제는 다 사랑이다. 죄로 어그러진 그릇된 사랑은 아이에 대한 애착을 집착으로 바꾸었고, 가정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스스로를 신경과민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가령 선교를 앞두고 아이를 두고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이를 데려가자니 신랑이 따라줘야 하는데 그이는 요지부동에 심지어 무슨 신령한 ‘촉’을 운운하며 불길한(?) 마음을 내비쳐서 이해가 더욱 난해해졌다. 그러면서도 선교준비모임에를 나가고, 안 갈 수도 갈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이 고달프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어디서부터 성령으로의 마음인지, 어디까지가 서로 노엽게 하고 투기하는 마음으로인지… 모든 게 뒤섞여버린 것과 같은 반증으로 자신 또한 집안 살림이 뒤죽박죽이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비워야 하는지, 오죽하니 시댁과 친정이 서로 지적하며 집안 꼴을 운운하며 자신들이 나서서 치우겠다는데도 저이는 죽을 맛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 분별할 수가 없어서 쌓아두고만 산다.

 

놓지 못하고 버릴 수 없는 심리적인 불안을 이해한다. 친구도 그러한 것에 예민하여 상대적으로 들으려하지 않는다. 곳간에 쌓여 썩고 있는데도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심리적인 불안은 소유에 따른 안정감과 동시에 무엇이 더는 소용없는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버리거나 비우라 하면 결코 따를 수가 없다. 마치 ‘부자 청년’과 같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이 있었는데도 가진 것을 나눠주고 오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무엇에 따른 조건도 순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저는 영생을 구하려고 왔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자신도 뭔가 모르겠으니 물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하고, 저에게 영생은 자격이나 조건이 있을 것이란 오해가 앞섰다. 하여 주님은 다만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쌓아두고 소유한 게 너무 많다. 그런 상태로는 주를 따를 수가 없다.

 

아이도 돌봐야지, 선교도 가야 하지, 친정에 터진 일도 관여해야지, 남편도 시댁도 건사해야지… 그야말로 듣다 지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저는 버릴 수가 없다. 마음의 병이다. 아픈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진 것과 같이 그 마음이 부서졌다. 남들은 정신없고 난잡한 것 같으나 저로서는 그것마저 버리면 오히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서로가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저의 사연을 들으면 어느 일부터 어떻게, 무어라 조언해야 할지 마음이 억눌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론은 ‘나를 따르라’ 하심이다. 영생을 얻고자 하면 주를 따르면 된다. 자식도 남편도, 친정도 시댁도, 저들은 저들의 하나님이 돌보시고 감싸 안으실 것이다. 그러나 저는 미덥잖다. 정말 하나님이 그리 해주실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두고 갈 수도 없는, 선교지에서의 도움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다.

 

누군 눈에 띄게 퇴화하는가? 늘 무얼 먹고, 누구와 만나고, 머리를 감으러 미장원에 가서 샴푸를 하는 이야기로 하루가 돈다. 저와 같이 아이의 퇴행에도 마치 둔감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인지, 본인이 정신 차리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는 인지능력을 상실했다. 책을 권해도 책 읽기를 싫어한다 하고, 약을 좀 복용하시라 해도 알약을 먹기 싫어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거절이다. 대체 오늘 이 현실의 무게를 느끼기는 하는 것일까? 당장 아이는 장애판정을 받고 자신과 같은 인격 장애를 겪고 있는데도 무방비상태로 수동적이다. 그나마 늙으신 친정부모가 이것저것 돌보니까 오늘은 가능한데 조만간 이 모든 일을 어쩌려는 것일까?

 

여러 부류의 사연을 정리해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은 가정공동체 즉 작은 교회가 붕괴되었다. 또한 저마다의 자기 사연이 우선이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극대화시켜 마치 오늘 그래도 되는 자신을 설정하였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들을 리 없다. 당장 애가 이상하고, 심지어 정상이 아닌 장애판정이 나고 특별 지도가 필요한데도 무감각하다. 말을 안 들어요, 그럴 리 없어요, 저는 그런 거 싫어요… 마치 똑같은 대본을 누가 나눠준 것 같다. 각각의 사연이 다른데도 서로가 같은 말로 권함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괜찮다고 한다.

 

비우고 버리시라, 하면 죽을 것 같다. 약을 먹으면 조금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으니 의지적으로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병원치료를 받으시라,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보니까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적당히 의존하고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말하면 돈만 생각하는데 물질적으로의 의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신랑에 대해 치를 떨면서도 저가 없이는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 같이 아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판단을 극단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결정이 옳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친 간섭과 또한 너무 가까운 밀착과 애착은 집요한 간섭으로 불안을 야기한다.

 

‘너나 잘하세요!’ 나는 속으로 울부짖듯 했던 말을 또 듣고 또 듣고 하면서도 뭐라 해도 소용없다는 데서 난감하다. 오늘 본문은 첫 구절에서 ‘구하라, 사모하라, 하라’ 하고 거듭 강조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모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핑계 저 핑계 저들은 할 말이 너무 많다. 나는 누구에게 한 번 비워봐. 못하겠으면 시어머니가 하겠다는 대로 하라고 맡겨드리든가, 친정엄마한테 맡기든가… 한 번 그래보라 하면 죽을 것 같다. 불안으로 쌓아올린 잡동사니 틈새에서 일흔두 살의 노인이 죽은 채 발견됐다. 저의 작은 골방을 치우는데 트럭 두 대가 필요했다. 실제 내가 아는 누구의 이야기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쥔 것을 놓아야 받는다. 비워야 채워주신다. 스스로도 말하길, 저는 믿음이 없나 봐요, 하고 변명처럼 한다. 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우리의 죄가 사랑을 어지럽혔다. 지나친 간섭과 참견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한다. 아이의 인생을 자신이 짊어지는 것으로 주가 맡기신 사랑이라고 우겨댄다. 점점 더 아이도 돌아갈 길이 없어진다. 엄마와 떨어지면 죽을 것 같다. 아빠가 좋은데 무섭다. 부디 그나마 이를 문제로 인식하는 저이만이라도 주를 의지하기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인가? 나는 누구와 누구의 말과 누구와 누구의 사연으로 세 시간, 한 시간을 통화하고, 거기다 전화로나마 성경공부까지… 종일 말과 말 사이에서 신음하였다. 점심 때 아이가 와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모두가 아픈 줄 아나, 저가 가장 온전하다는 데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말의 지겨움을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만 불렀다. 주가 다 아시니, 아뢰는 일도 말이 필요하여서 그저 주님, 하고 성경을 읽어주는 앱을 틀어놓고 눈을 감고 아가서 본문을 무한반복으로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나의 곁에 두시는 이들의 사연과 사연이 천차만별인 것은 사실인데 모두가 그 대응은 하나 같이 똑같다. 저들은 절대 순순히 듣지 않는다. 대놓고 싫다하는 이나 알았다고 하는 이나 공통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한다. 누구하나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가 필요하고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이를 글로 쓰면서 그런 가운데 주가 어찌 함께 하시는지 알자고 해도 단 한 사람도 그리하지 않는다. 자식이든 남편이든 애착이 고착되어 상한 영혼으로 문드러져 가는데도 서로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군다.

 

나는 종종 주께 내가 말해도 듣지 않는데, 왜 저로 말하게 하시는지를 묻는다. 말이 지겹고 저들의 사연도 지겹다. 아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내게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덕을 세운다 함은 주를 나타내는 일일 텐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하는 게 없어서 눈물만 찔끔거린다. 그럼에도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16:6).

 

그러하다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에라, 모르겠다. 나야 말로 주 앞에 기도하며 저들의 사연과 거리두기를 위해 주께로 선회한다. 나의 과잉감정이입을 주의하면서 다만 말씀을 붙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리하여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20:4).

 

그러므로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누굴 위한 기도가 내 것이 되는 것을 믿으며,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