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전봉석 2024. 4. 17. 04:10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4-25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 38:9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저 생각과 느낌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설령 현실은 내가 바라고 믿는 것과 다르다 해도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는 일이 믿음으로였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게 아니다. 저들이 우리의 적이 아니다.

 

세상은 악한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저들의 일이다. 악할 때에 사용하시기 위한 악이라, 저들도 하나님이 그리 사용하신다. 바울은 주후 35년에 개종하였다. 그때까지 저는 예수를 대적하는 자였다. 로마서를 쓸 때 저는 개종한 후 22년이 지났을 때이다. 비로소 저는 확신하기를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열심을 다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

 

그러는 동안 저는 악한 로마의 폭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한 번도 이른 적이 없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다. 이후 로마는 400여 년이 더 지난 뒤에 망하였다. 476년에 멸망하기까지 로마의 폭정은 잔인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도, 바울도 로마와 맞서 싸우거나 저들을 상대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거나 이를 장려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저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때에 그들로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고, 그 이유는 믿는 자들을 더욱 더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오히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다른 분량으로 그 신앙과 믿음의 정도를 수행하고 완수하는 거였다. 곧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 그러니 저마다 하나님을 아는 데 하나가 되는 것이나 그 쓰임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받은 정도가 다르다. 이는 우리가 보다 넓은 시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에 순응함으로 맡기신 바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를 알 때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이 세대가 악함을 증거한다. 증거하여 하나님을 더욱 바로 알고자 하는 데에 우선하고 그 뜻을 따라 자신에게 맡기신 바 먼저 아는 것으로 나중 아는 자를 이끈다.

 

같이 성경을 말하고 말씀을 삶으로 적용하면서 누가 물으면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8).” 저들로 알게 하기까지 더러는 성가시고 더러는 괜한 일 같으나 그 일을 위해 오늘 나로 여기에 두셨다. 누구를 곁에 보내신다. 저의 일로 우리가 씨름한다.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함께 한다. 이 일은 창세전에 감추어져 있던 일들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를 아는 일에 놀라워하며 그의 쓰임에 합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바울이 받은 이 확신으로 오늘 우리가 산다. 나의 일을 되새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어떤 일을 주의 뜻으로 받아 이에 순종하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당시 로마의 압제보다 오늘의 문화나 유행이나 상식이나 흐름이 성경의 진리를 대적한다. 믿는 자로 살면서도 누구는 이 일에 민감하고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타협한다. 누구는 두 주인을 섬기듯 세상과 교회를 넘나들며 믿는 자로 산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신앙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에 그 수가 비록 적으나 확신한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0-21).”

 

고로 우린 오늘 이 비밀을 맡은 자들로 살아간다. 그래서도 우린 적을 물리치고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정의구현을 위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오히려 이를 알리고 우리 곁에 두신 한 영혼으로 이와 같은 일을 계기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일, 예수님은 이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4-6).”

 

곧 나는 요즘 새로운 시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 다시 말해 우리로 세상을 대적하는 게 일이 아니라, 저들의 악함으로 우리 영혼을 돌보는 일,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이를 통해 더욱 주를 더욱 바랄 수 있게 하시는 일,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할 것은 단순히 이 시대의 혈과 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저들은 사탄으로 저들도 저들의 시대에 저들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할 뿐이다. 그들의 일이란 믿는 자들로 환난을 더함으로 주를 더욱 온전히 알고 바라고 믿음으로 더욱 더 본향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일이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 29:13-14).”

 

이와 같은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정작 그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었으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하여 나는 종종 무섭다. 믿음이 관념적으로 다가올 때는 믿는 이로 자신하지만 이것이 삶에 실전으로 다가올 때는 진리를 주저하고 세상과 타협하기 일쑤다. 아이 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는 어렵다. 어느 모친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의 애정과 가족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우선할 때 자신의 신앙마저 저버리는, 가족이 원수다. 이런 것을 볼 때 성령이 아니면 우리로서는 이 신앙도 믿음도 감당이 안 된다.

 

오늘 바울은 답답한 심정으로 묻는 것 같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이를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는 설교 중에 외치길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저의 말은 간곡하였고 절박하였다.

 

이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 놀라운 목적과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고 행하는 자신의 노력으로 우린 괴로울 따름이다. 누가 뜬금없이 신학을 하겠다고 한다. 덧붙여 하는 말은 ‘나중에’ 더는 할 게 없을 때, 누구는 성경을 더 알고자 열심을 다해 배우겠다고 한다, 나중에. 저의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장가도 가야하고 새로 산 밭도 있고, 소 다섯 겨리도 건사해야 해서’ 그러니까 나중에, 조금만 더 있다가, 나중에. 나는 저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나중은 없다. 내일 일은 내일의 것이다. 그래놓고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앞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말이 아니라, 행함이었다. 이 행함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에 우리는 고난을 달게 받는다. 힘들고 어려우나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이를 아무리 전하고 일깨워도 각자의 판단과 그 행함으로 하는 일이었으니 내가 더는 강제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멈춘다.

 

누구와 대화하다 더는 그만두고, 어떤 이를 권하여 손을 내밀다 그냥 둔다. 결국은 저로서도 갈 데까지 가 봐야 하는 일이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다만 나와 같이 너무 먼 길을 돌아 나오지 않기를 바랐을 뿐. 바울은 절규하듯 묻는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4).”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악한 세상과 저들의 권세 잡은 이로 겪게 되는 어려움으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 하고 되묻는 것이다. 그러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어떠했는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그러하면 오늘 우리의 환난과 역경은 우리로 더욱 주를 바로 알고 온전하게 주의 자녀로 훈련하게 하려 하심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므로 세상이 어떠하고 그 악함을 탓하며 원망할 것 없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3-15).”

 

이 놀랍고도 역설적인 하나님의 교육 방법, 훈련의 시간을 안다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이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 이를 알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나는 어느 쪽인지, 스스로 점검하게 한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자신의 욕망을 허용하고 사는 그리스도인 같은 그리스도인인지, 진정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으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인지.

 

저마다 믿는다고 하고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며 사는 이때에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답답함으로 혹은 억눌림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며 오히려 나의 영혼을 살피게 하심이니,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노여워할 게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22).” 하여 오늘 더욱 몇몇은 주의 약속을 확신한다. 그리고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5).” 더는 예전의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이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 그러므로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 38:1, 9).

 

비록 산다고 사는 동안 주를 멀리했던 어리석음을 뒤로 하고,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5).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