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전봉석 2024. 4. 19. 04:10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5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2, 17

 

 

두더지 같은 신자가 있다. 저는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 같이 자신의 이해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 파고든다. 개나 돼지와 같은 신자도 있어 저들은 늘 땅에 코를 박고 세상의 것으로 킁킁거리며 신앙을 허비한다. 걷는 새도 마찬가지다. 구구거리며 땅만 쪼아댄다. 얕은 하늘을 나는 새들 같은 성도도 있다. 저들은 나름은 신앙의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지만 시야가 좁아 늘 그 자리만 맴돌듯 텃새로 길든다. 독수리 같은 성도도 있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올라 그 눈은 넓고 정교하여 사방을 두루 살핀다.

 

그러므로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이에,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5).

 

우리는 곧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이에 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나누며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어 나는 저에게 들려주려고 말씀을 준비한다. 교회에서 하는 ‘어, 성경’을 두 번째로 다시 듣고 있다고 하여 그간 7천년의 성경의 역사를 두루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면 질문이 나고 나 역시 말씀을 준비하는 데 있어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가령 왜 하나님은 ‘천사 타락’을 저지하지 못하셨나?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왜 보고만 계셨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인류 역사에 있어 세계전쟁을 위시하여 비극적인 사건마다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 것일까? 하는 식으로 어떤 의문은 단순하고 타당하다.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사 17:12).”

 

성경은 이를 결코 지지하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게 아니다. 다만 피조물들 가운데 천사와 사람은 인격체로 지으셨다. 인격이 형성되고 자라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책임도 있다. 천사의 타락을 하나님이 저지하지 못하셨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의 죄를 막지 못하신 거라면 이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천사의 타락으로 저들은 자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고, 파괴자, 분리하는 자가 되었다. 그들이 사탄과 마귀다. 사람의 죄는 구원을 전제로 하게 되었고 이에 ‘첫 복음’이 필요하게 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것으로 바울은 믿는 자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본구원을 정립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로써 초기 신학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 하는 내용으로 확장하였다.

 

곧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6-17).” 이에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의 구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하는 말씀의 타당함을 입증한다.

 

이는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19, 20-21).” 이와 같은 바울의 신학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하는 우리 믿음의 구원에 초석을 다졌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삶은 창세전, 하나님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같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삶을 지나간다. 이를 또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우리는 모두 본향 곧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다.

 

야고보는 인생을 안개 같다고 하였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곧 영원한 세계에서 시간의 세계, 오늘까지 7천년 정도의 역사로 이어졌고, 우리 개개인으로는 고작 길어야 백년의 시간도 아닌 것을 두고 아등바등 용을 쓰고 산다. 자주 느끼지만 나는 가끔 상상하기를 영원이란 시간을 생각하다보면 두려움이 든다. 끝없는 시간의 영속성을 어찌 감당할 수가 없다.

 

오늘 나의 삶을 두고도 까마득한 것 같다가도 한 뼘 길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 날들을 두고 마음이 어지럽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찌 가늠할 수 없어 주체가 안 된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살 본향을 앞두고 그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원한 시간의 영속성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친구는 꾸준하게 점심을 일찍 먹고 3, 40분 시간을 내어 전화를 한다. 일상의 소소한 일에서부터 성경을 읽다 모르겠는 것을 무작위로 묻거나 듣는다. 어제는 십자가의 구원이 창세전에 이미 우리가 예정되고 택정하심을 받은 것처럼, 사람의 죄로 인하여 구원은 필연적인 사건이 되었고 이 계획은 모든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였다. 천사의 타락도 저에 대한 재판은 이 세상이 멸망하고 예수 재림이 이루어지고 난 뒤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이는 마치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아직 사람이 죄를 짓지도 않았고 천사가 타락하기도 전에 지옥을 만드는 이유와도 연결이 된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4-15).” 하나님은 사탄으로 인하여 우리를 훈련하는 선생으로 삼으셨다. 저들은 이 세상의 왕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또한 우리가 사는 동안 이 땅의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곧 저들은 이 땅의 신들로 온갖 우상이 되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단순하게는 타종교의 모든 신들이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마음을 두는 모든 대상이다.

 

우리의 대화는 두서없으나 그 내용은 나로 하여금 성경을 더 알게 하고 보게 하고 이를 묵상하며 여러 성경으로 찾아 근거를 삼게 한다. 친구는 이 모든 게 창세전에, 오늘 이 모든 게 있기 전에 있었고 계획되었다는 데서 놀랐다. 가령 창세전 3층천에서 이 모든 계획은 삼위 하나님에 의해 설계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2-4).”

 

이러한 말씀의 세계를 알고 더하여질 때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열어 보이시는 데 놀란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우리가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만,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설명하려 말을 하다, 말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이는 친구의 열심이 오늘의 나로 저에게 들려줄 말씀을 열어보게 하였다. 제자반 성경공부에, 새벽예배에, 다시 새로 듣는 ‘어, 성경’을 통해 성경을 더욱 알고자 하는 저의 열망이 덩달아 나의 지혜를 풍성하게 한다.

 

가령 오늘 오는 ‘아이의 일’로 나는 어떤 말로 또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저를 권하고 위로하며 주의 뜻을 알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게 한다. 나의 연구란 생각하기와 묵상하기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는 데서부터 지금 저들의 실정을 어찌 알게 하여 그 상한 영혼을 돌이킬 수 있을까… 그야말로 ‘하나님으로 인한 근심’이 나를 사로잡으시는 것 같다. 그만두겠다는 말이 늘 나의 목구멍까지 치달았는데 정작 통화를 하거나 만나면 그 말 대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려는 마음이 말로 전달되어 나온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런데 늘 우린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와 같이 또는 싸고 뭉개며 자신의 똥 위에 몸을 비벼대며 눕는 돼지와 같이 대책이 없다. 바울은 답답한 심정으로 말씀을 전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 아니, 은혜로 우리 두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도로 율법에 매여 이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기 원하는 일이었으니, 나는 저들 내외와 아이를 생각하고 그 가정과 저들을 사역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더 높이 올라 독수리의 시선으로 전후좌우를 살피려고 한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7-9).”

 

오늘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과 안타까움으로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 같으나 나는 이것으로 말씀을 뒤적이고 그 깊이와 높이를 알고자 주께 구하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하여 나는 오늘도 못하겠다는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어떤 말로 위로하고 권면해야 할지를 주께 묻는다. 이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성령으로, 성령에 따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

 

그리하여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이와 같이 그 열매가 자라가고 무르익어 가는 것을 믿는다. 이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결국 나는 내 곁에 두시는 저들 한 영혼으로 내가 주를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이어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5-26).” 오늘 말씀은 마치 내게만 들려주시려는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하였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그러므로 나는 주께 기도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17).

 

오늘도 비록 대단한 일도, 별로 하는 일도 없는 하루이겠으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5).

 

그러하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