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2-13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1-2
가족과 친구와 교회라는 구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 되게 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는 데 있어 이는 계명 가운데 사람을 향한 처음 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 앞서는 말은 ‘주 안에서’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이는 제한의 의미가 아니라 확장의 의미이다. 가령 부모가 예수를 믿는 데 있어 반대할 경우 부모를 위해서도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버린다 하는 것은 저로부터의 탈피다. 거듭남의 원리로 합당하다. 자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렇고 부부 사이의 일도 일정한 기준, ‘주 안에서’의 사랑이다. 가끔 생각나는 한 예가 누가 저 혼자 신앙생활을 하다 교회를 버렸다. 저의 말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예수를 안 믿고 있는데 자기 혼자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느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옥에 가는 게 낫다는 식의 이유였다. 그때는 그랬다. 그렇게 십 수 년이 흐른 뒤 유연히 저와 연락이 닿았다. 어찌 지내는가? 물었더니, 친정엄마와 둘이 양평 어디에서 산다고 했다. 신랑과는 이혼을 했고 애들 둘은 장성하였는데, 아들은 아빠 따라 등지고 살고 딸애는 결혼하여 가끔 연락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장담하는 관계란 설령 그것이 부모자식 간의 천륜이라 해도 하찮다. 하찮은 것은 그 마음으로 스스로의 장담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관점은 분명하여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 6:21).” 물론 이는 ‘주 안에서’이다.
보면 서로 사랑이 늘 문제다. 어제도 누구의 일로 통화를 하다 ‘이대로 좋아요!’ 하는 말에 어떤 권면도 위로도 쓸모없는 게 되었다. 물론 ‘아픈 아이’ 때문이라 해도 저 스스로는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는 일이라, 정작 저가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이 자신을 위함인지, 자식을 위함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분명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하심과 같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는 성경의 논조는 뚜렷하다. 이는 모든 사회 속의 관계에서도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5).”
이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서로를 맺어주심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다. 내가 어찌하려 하는 앞서는 마음이 늘 일을 그르치기 마련인데,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 127:3).
곧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는 맡은 자일 뿐이지, 소유나 천륜 인륜 따위로 매일 게 아니다. 그런데 보면 아이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그 엄마가 영락없이 이상하다. 늘 나의 편협한 편견이길 바라는데 듣다보면 아이의 이런저런 문제라는 게 그 부모의 것이어서 애가 유난스럽다 싶어서 살펴보면 엄마가 늘 한술 더 뜬다. 희한한 것은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데서 모든 문제는 막혔다. 어제도 누구와 통화를 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엄마가 약을 좀 먹고, 보다 적극적으로 활기차게 생활하면 어떨까? 하고 여러 날 생각했던 것을 두고 권하였던 것인데, 이대로가 좋아요! 하는 말 앞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어떤 강한 벽을 느꼈다.
신앙으로의 양육이 필요한 것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우리는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를 위해서도 ‘같이 하자’ 하는 권유였는데 그리 거절을 당하고 보니,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나는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다 자식 일에 관대한 저의 태도에 정신 차리라고 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자신은 애써 신앙을 지키고 성경을 알고자 하고 새벽예배도 하면서, 안 믿는 자식이 술 한 잔 하자는 자리에 거리낌 없이 합석을 하고 저와 두런두런 나누는 부자지간의 정에 고마워하는 일이었으니… 장성한 아들과 그러고 싶은 그 심정은 이해한다. 저는 부친과 그런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형에 대한 남다른 애착도 그래서다. 문제는 형도 안 믿는 자이고, 큰 아들도 안 믿는 자이다. 다른 권면에는 다 수긍하다가도 그 둘에 대해서만은 마치 모든 기준이 허물이지는 듯하다. 어쩌다 주일 전날 형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한다거나, 아들이 부르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식이라, 그 마음은 인정하나 그의 약함을 사탄도 안다! 이를 쥐고 흔드는 일이었다.
우리가 신앙의 관점에서 그 중심을 잡는 일은 실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믿음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이도저도 아니다. 물론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 그러나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5-16).”
너무 극단적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목사님 내외는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신앙 안에서 키운다고 키웠는데,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큰 아이가 교회를 떠나고 안 믿는 자와 결혼을 하는 데도 어쩌다 그리 두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사는 것에 사모님은 딸애를 두고 주께 돌아기만을 기도하였다. 결국은 이혼을 하고, 큰 애가 위암에 걸려 돌아왔다. 그렇다면 신학까지 한 둘째는 좀 더 지혜로 믿음 안에서 붙들었어야 하는데, 이상하지? 그 또한 안 믿는 가정에 안 믿는 아이를 만나 서로가 좋아 죽겠다고 하니, 앞서 큰 애의 경우를 보고도 결국은 그리 둔 모양이다. 안 믿는 시댁의 풍족함과 넘치는 가족애에 둘째가 교회를 떠났다. 세상적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
이를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 여기는 데서 우리의 한계는 드러난다. 딸애가 그러한 친구네 사연을 말할 때 나는 듣기만하다, 부러우냐? 하고 물었더니, 아빠라면 어떻게 하겠어? 하고 되물었다. 나는 입을 내밀고 생각하는 척하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말을 하고 내게 들려주는 의도를 알 것 같아서이다. 돌이켜 주 앞에 오고 난 뒤 나는 뚜렷한 선을 하나 그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게 설령 자식 일이나 내 자신을 위한 일이다 해도, ‘아닌 것’ 곧 주의 뜻을 거스르는 일, ‘주 안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 외의 일에서는 호구 잡혔네, 바보 같네, 하는 소릴 들어도 상관없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이는 그래도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오늘 말씀은 우리의 가는 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곧 우리의 판단 여부는 마치 전쟁 같다. 이와 같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단순히 서로의 관계, 천륜이니 인륜이니 하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능력껏 안 된다. 이를 인정할 때,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그에 따른 구체적인 준비를 열거하고 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내가 지금의 내 판단과 기준으로 내가 알아서, 지금이 좋아요! 할 때는 대책이 안 선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상대하는 일에서도 무장이 필요하다. 다들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데 나는 내가 날 이기는 게 제일 어렵다. 죽어라, 하고 내가 이처럼 이른 새벽에 교회로 나오는 일도, 더러는 몸이 천근만근일 때도, 자,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어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성경에 감추어놓으신 복음의 비밀이다. 오늘 바울도 이를 위해 자신을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9).”
다음은 ‘의의 호심경을 붙여야 한다.’ 우리의 심장을 보호하는 데 있어 의의 호심경은 ‘하나님의 의’다. 이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이로써 우리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한다.’ 신은 발을 보호하고 발은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로서는 걸어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 한 치 앞도, 한 날의 수고도 모른다. 내일 일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말씀을 행하며 산다는 일은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서는 일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무엇도 알 길이 없다. 당장 어느 가정의 둘째 딸의 결혼생활이 부럽기만 하다. 부모의 재력으로 한강변 어디 수십 억 하는 아파트에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재물이 붙고, 시댁어른들의 남다른 사랑에 더 바랄 게 없는데… 그래서도 주말을 끼고 주일마다 어디 나들이를 나갈 때 마다할 이유가 없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렇듯 아무 일도 없는 주말에나 못이기는 척 교회를 가고, 예배를 참석하는데 그것도 안 믿는 신랑 혼자 집에 두고 가기 뭐해서 작은 방에서 줌으로 참여한다고 하니! 우스갯소리 같으나 부러우면 지는 거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1-3).
솔직히 저들의 잘 됨은 이상할 정도로 부럽기는 하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우리는 알기를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의 안락과 풍요가 ‘소멸’의 시작이다. 무슨 명품 백 하나에 수 천하는 것을 들고 다닌들? 수 십 억의 호화로운 주택에 살고, 돈이 돈을 부르듯 따라서 투자의 귀재로 쉽게 돈을 버는 저의 능력이 과연 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린 더욱 각성하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를 들고 싸워서 무찔러야 한다.
어제에 누구의 한 마디, 이대로 좋아요! 할 때 나는 두려움이 헛웃음처럼 나왔다. 아, 오늘 말씀은 이르길,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우리에겐 분명 바울이 가진 담대함이 필요한데,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19-20).”
그렇게 한 생을 살고 끝도 없는 영생을 잃느니, 한 점에 불과한 일생의 일로 쓸려다닐까 두렵다. 부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그리하여,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47:1-2).
이를 알 때,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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