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전봉석 2024. 4. 28. 04:4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8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자비다. 권면은 ‘곁으로 부른다’는 것이고, 위로는 설득하여 격려하는 일이다. 교제는 성령으로의 것으로 아니면 인간적으로의 것인데 이는 어김없이 파당을 짓는다. 또한 우리의 긍휼은 사랑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이로써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첫 문을 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어느 때보다 화가 넘치는 시절이라, 특히 운전을 하다 자칫하면 죽자고 덤비는 경우를 더러 경험한다. 또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상해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냉소적이다. 점점 더 사람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권면을 잔소리나 참견으로 여겨 기분 상해하기 일쑤고, 위로로 자존심을 상해한다. 긍휼과 자비는 오히려 시비가 되고 교제는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비즈니스적인 관계 이외의 것을 경계한다. 고학력으로 저마다의 배움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그 마음은 황량해졌다. 이에 말씀은 친히 이르길,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그러므로 우리가 임의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해서 될 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것이 아니면 꼭 그 뒤끝이 좋지 않다. 보면 다 처음과 끝이 같지 않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나눌 것처럼 굴다 어느 정도 이득이 남거나 또는 손해가 오면 저마다 자기 잇속부터 챙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누구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람관계보다 어렵고 무서운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서로 하는 말이 너무 친절하고 잘해줘도 조심해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가 고바사막의 모랫길 같다. 나야 늘 제한적으로 그 동선이 이어져서 서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이 적은 편이지만 그러는 중에도 시빗거리는 틈을 노리는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늘 보면 지뢰밭 같다. 같이 나란히 곁을 하고 있는 사무실도 섣불리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그저 친절한 타인으로 거기까지인 것인지 행여 무얼 나누거나 부탁할 때는 경계의 눈초리가 매섭다. 그런 거 보면 옛날이 나았다. 이런 말이 싫지만 같이 뭐라도 나눠 먹고 오고가며 인사하고 드나들던 사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보다 못하게 될 때 어찌 해도 안 되는 벽을 느낀다. 하여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아내의 핀잔에도 인포메이션의 상호를 붙이는 데도 옆 사무실 것의 반값을 대신 더 물어주었다. 이번에 에어컨을 같이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내가 무슨 빌어먹는 사람처럼 제 값 다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어제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다 곁에 있던 이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습관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주문을 하고 앉았는데 누가 다가오더니 일부러 밀쳤냐며 따져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도 죄송합니다, 하고 말았더니 아내는 왜 사과를 하냐며 뭐라 하였다. 요즘은 애고 어른이고 마치 걸리기만 해 봐, 하며 분풀이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위축 들지 말고 권면하고 교제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누구에게 무얼 한두 번 권하다 싫다 하면 그만둔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좋지 않는데 다시 뭐라 말을 건네기도 어렵다. 그렇게 누군 아이 일로 더는 상종을 안 하려는 사람처럼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면서도 나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마음만 쓸 뿐이다. 우리의 사귐이 주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지만 그게 또 자기 뜻대로가 아니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이와 같은 말씀이 이제는 낭만적인 것인가?

 

우리 안에 주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모든 게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으로다. 내가 참거나 손해 보거나 더러 억울한 마음이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하물며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어려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가급적 어떤 교류를 피하게 된다. 내가 선의로 대한 것을 공격으로 느끼고, 호의를 권리로 받는 상대를 대하면서는 이를 지속하기가 참 어렵다. 좀 손해를 보고 돈을 더 내더라도, 뒤로 밀려 저를 앞세우고 난 뒤에 하는 것이 낫다. 이는 손해가 아니어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위축되고 주눅들 일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섣불리 먼저 연락하는 일을 안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은 좀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일조차 서로 꺼려지는 일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이를 타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오늘 내게 절실한 게 예수의 마음이다. 설령 그리하여 상대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된다 해도 나를 낮추고 비워 ‘종의 형체’로 사는 일. 더러는 억울하고 어이없는 일이나 가타부타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상대를 탓할 것 없다. 시대가 그러하고 서로의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져 간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오늘 우리로 날마다 죽어서 날마다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왜 그러는가 그 답이 여기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설령 우리가 진 것 같고 당한 것 같으나… 우리의 결국은 이 땅에서 판결나지 않는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심지어 아내도 뭐라 하며 바보 같다고 핀잔을 할 때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만다. 누군 병적이라 하고, 아픈 것이라 해도 그 또한 개의치 않는다. 굳이 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내가 이상한 사람 같다 해도 엉뚱한 사이로 엮이는 것을 피한다. 그것을 두고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만다. 같이 말씀을 나누고 주의 이름으로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는 것이면 모를까, 겉치레나 서로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미연에 경계하게 된다. 우리가 굳이 좋은 관계로 나아갈 게 무엇이겠나? 서로가 사는 세상이 다른 것이어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저가 내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을 아는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 하여 어떤 이유나 목적으로 가까이 하는 사이를 피한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일에서도 어떤 계산이 앞서거나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없지 않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5-16).”

 

먼저 이런 말을 하면 나의 모난 성경을 탓하는데, 서로 좋은 듯하다 나중에 어그러지고 나면 저도 안다. 늘 보면 서로가 끝이 안 좋다. 사람의 기본 관계인 듯하다. 나는 아니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저에게 나 또한 서운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호의가 권리가 되었다가 이를 거두면 졸지에 나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다. 점점 어려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피해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집착하고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나 취미를 선호한다. 서로의 단절은 떠도는 섬과 같아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해도 결국은 떨어져 있을 때 편하다. 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를 위해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바보가 된다.

 

나의 주장을 삼가고 기다리거나 혼자 마음을 다독인다. 서로를 부담스러워하고 꺼려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난 어려서 그런 시선이나 태도가 어떠한가를 잘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친절을 가장한 거리두기를 나는 눈치껏 알아서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주의 사랑으로 저를 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주께서 본을 보이셨으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어서 우리 의지로는 안 된다. 안 됨을 인정할 때,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9-30).” 오늘 말씀을 되새기며 이를 어떻게 나의 삶 속에 두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시 49:1-3).

 

오늘 시편은 사뭇 일러 가르친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5-8).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이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하신 말씀으로 나를 주 앞에 내려놓으며,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2).

 

하는 진리를 알고, 결국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