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19-21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예수를 통한 성도의 구속을 증거하는 데 있어 서신서가 이를 집중하고 그 가운데 특히 옥중에서 쓴 빌립보서가 으뜸이다. 주후 61-63년에 쓴 것으로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 곧 우리는 모두 주의 종이다. 첫 인사말 속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이는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2:19).”
바울은 다른 서신과 달리 자신을 ‘사도’라는 호칭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종’으로만 표현하는데, 빌립보에서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도전받지 않았기 때문이겠고, 신자들과의 깊은 사랑의 결속을 통해 사도라 자칭할 필요가 없었다. ‘종’은 노예라는 말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죄의 공포로 해방된 것을 상기하고 이를 또한 나타내기 위함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8, 22).” 우리가 성도인 것은 정결함으로 죄에서 분리되었음을 알린다. 이로써 우리는 감독자 혹은 장로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주관하도록 목사와 장로로 세움 받은 사역자인 것을 알게 한다. 집사는 헬라어 ‘디아코노이스’로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성도를 뜻한다. 서로 돕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당시 빌립보교회의 감독과 집사들이 헌금을 모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덧붙여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하고 축원한다. 은혜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오는 선물이다.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시다.
바울이 옥중에서 ‘변하지 않는 기쁨’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꺼이 간구하는 것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5).” ‘복음을 위한’ 기도와 헌금으로 이를 행함이 쉽지 않다. 이는 성도의 교제로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 9:13-14).”
이를 나는 교회를 이뤄가며 직접적으로 늘 한결같이 후원헌금을 하는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일련의 어떤 일들이 처리되는 데 있어 가령 주인이 에어컨 수리비 60만원을 선뜻 대신 부담하는 것도 그렇고 수리기사가 출장비를 포함하여 청소하고 점검하고 드는 비용 7만원에서 2만원만 청구하는 일 등을 보면서… 주의 손길을 느낀다. 곧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6).” 물론 섬기는 교회에 그리하는 일은 마땅하다. 한데 멀리서 늘 기도하며 이를 주의 일로 그 교회로 섬겨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이들의 손길을 두고 나는 늘 희한하고 신기한 주의 도우심을 느낀다.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였을 때 복음 사역을 시작하는데 있어 루디아는 그의 집을 개방하였고,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4-15).” 옥을 지키는 간수는 그를 친절하게 대접하였으며,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
2차 전도여행 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 있을 때에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헌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빌 4:16, 고후11:9).”
나는 이를 나의 생에서 혹은 교회를 이루면서 누구보다 실질적으로 느끼고 체험한다. 자주 언급하였듯이 학부로 신학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97학번으로 전혀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닌 어떤 이가 선뜻 나서 오히려 나를 설득하면서 편입 후 5학기의 등록금 일체를 부담하여 보내었다. 그런데도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갔다, 09학번으로 다시 붙들려와 신대원을 할 수 있던 것도 그 때 그 학부를 억지로라도 마쳤기에 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대원 6학기 내내 단 한 번도 내가 내 힘으로 대학원 등록금을 부담한 적이 없다. 그땐 그야말로 광풍과 같이 몰아세우심으로 공황발작에 신용회생기간으로 매월 565000원을 5년 동안 부담했어야 하는데, 그땐 또 신기하게도 생활비와 함께 글방에 아이들로 이것이 충당되고 남았다.
나는 이런저런 실제의 경험으로 주가 강권하심의 실체를 잘 안다. 오늘 바울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3-5).” 하는 이 의미를 잘 안다. 이에 덧붙여 기도하기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오늘도 우리 교회를 두고 기도하며 물질로나 마음으로 후원하며 응원하는 이들의 그 마음을 주의 것으로 안다. 직접적으로의 착한 일은 헌금을 가지고 전도 사역에 참여한 것을 의미한다. 곧 자신들이 드리면 얼마의 헌금으로 이 교회가 운영된다. 실제 우리 교회의 성도로는 감당이 안 된다. 또한 누구의 글쓰기를 도우며 저의 상한 영혼을 위로하고, 말씀으로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데 있어 오히려 당사자들은 그에 따른 헌금을 낼 줄 모른다. 그럴만한 믿음의 역량이 없다. 누가 늘 돈을 정해 얼마를 받고 하라는데, 그런 고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는 왠지 마음이 어렵고, 저들도 그렇게 낼 수 있는 심령의 상태가 아니다.
그러할 때 구속사역의 은혜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인정하는 이들이 자원하여 보내주는 헌금으로 우리 교회는 이번 달도 운영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될 것을 믿는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 이에 그리스도의 날까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로써 주의 날 곧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의 날,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하는 말씀과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1:14).” 하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감당할 뿐이다.
어제도 친구와 하는 점심시간의 성경공부에서, 물론 편한 친구 사이니까 그러겠으나 자신이 품고 있는 이해부족과 나의 설명이 탐탁치가 않은지 ‘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알겠어!’ 하고 일해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 것이다. 그럴 때 확, 드는 어떤 불쾌감은 애써 30분 넘게 설명하며 이를 알게 하려고 성경의 여러 곳을 메모하고 설명하였던 수고가 머쓱하다. 또는 아이가 와서 오후에 같이 저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성적인 문제와 이성에 대한 관심, 돈에 대한 집착과 생각 없이 허비하는 일에 대해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아이와 대화하다 내가 이상해지겠다! 뭔 소릴 하고 있는 것인지! 뜬금없고 맥락 없는 말을 이해하느라, 혹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전달하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말이 더 꼬인다. 그럴수록 아이 또한 답답한지 더, 더, 하며 세 시간을 넘게 같은 말로 시달렸다.
이런 일, 하나마나 한 일 같은 이런 일을 하고 혼자 남겨졌을 때 순간에 밀려오는 어떤 허탈감 같은… 나는 나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다. 친구라도 오히려 더 부딪치게 되는 어떤 어려움이나 이해하고 잘 안다고 여기는 아이라서 더 말이 안 통하는 일에서, 나는 순간순간 감정이 상한다. 벽을 느낄 때는 그만두고 싶다. 결국 아이엄마는 글을 쓰지 않았고 사모와 아이는 오지 않았고 가타부타 연락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돈벌이로 하는 일이면 원칙이란 게 있어 그에 따라 한다 못한다 하고 냉정하게 할 수 있겠는데….
더러는 상한 영혼이고, 아픈 아이면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자가 아집에 빠진 경우도 있어서 나는 저들로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뚫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내가 넘어갈 수도 없는 높이와 두께다. 그러니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럼에도 즐거움으로 하게 되는 일도 아니어서… 때로는 억지로, 때로는 나를 쳐 복종시키면서도 한다. 종이란 그런 노예의 속성으로 임하는 사역자이다. 내가 임의로 나 좋을 대로 하는 게 아닌 거였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0-21).”
나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속 끊여 여러 번 할 말을 생각하다 권면한다고 한 것인데, 이대로 좋아요! 하고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할 때, 동의할 수는 없지만 알겠어! 하고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할 때, 그렇다고 연락조차 한 번 없이 그대로 사라진 듯 더는 오도가도 않는 소식을 기다리며…. 이게 지금 뭐하고 있는 일인가? 하고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저들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뢰고 있을 때,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2-24).”
생각 같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은데,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 오늘 바울이 들려주는 이 마음을 나의 위로로 받아도 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27-28).”
내게 들려주는 말씀으로 받으며,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하심을 명심하게 된다. 곧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이다(빌 3:20-21).” 이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1:29).” 그러하다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이는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6).
오늘의 이런저런 갈등과 회의와 어려움으로 나는 비로소 한 영혼이라도 주 앞에 인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9-10).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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