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2-23
우리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헛된 삶이 있을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예수 안에서 느끼는 것으로 오늘 바울은 이를 주목하게 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이 기쁨은 언제라도 잃을 수 있어서 우리가 사는 오늘에 홀리면 그러하다. 하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2).” 하는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이를 같이 한다(3).
그야말로 참 비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집집마다 애완동물을 키우고 어떤 캐릭터로 만들어진 사물에 홀려 끌림을 마다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 홀림과 끌림으로 우리 영혼을 잠식당하여 정작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한다. 가령 어제 오후 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산책을 하고 길거리 어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한 무리의 어떤 동호회 사람들인지 지긋한 나이의 예닐곱 명이 우르르 몰려 커피니 음료를 시키면서 왁자하니 무슨 회비를 걷느라 시끄러웠다.
그때 지나가던 개들 두어 마리가 발밑에서 와서 짖고 바짓가랑이를 핥았다. 그것이 귀여운지 서너 명이 허리 숙여 개를 쓰다듬고 서로 안아보려 좋아라 했다. 의자가 모자라서 우리 쪽에 있는 것 두어 개를 끌어가고 것도 모자라서 실내에 있던 것 두어 개를 가져나오려 했다. 그때 딸애 같은 혹은 손녀 같은 종업원이 난색을 표하며 실내 의자를 밖으로 내가시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두 명이 설전을 벌이더니 언성을 높였다. 급기야 막말을 하고, 악담을 퍼붓고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주문한 것을 도로 다 물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평소 안면이 있는 가게라 나는 종업원의 불쾌해 하는 표정과 저들의 무례함에 은근히 화가 났다. 하다못해 길을 가던 개가 자신들의 바짓가랑이를 핥고 짖고 비벼댈 때도 좋아라 하던 이들이 어린 종업원, 손녀 같은 사람에게는 그처럼 함부로 말을 하고 급기야 주문이 다 들어가 준비하던 것을 물리고 서로 뭐라 하면서 다른 데로 우르르 몰려가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사람이 개만 못한 관계로 그저 돈지랄을 하고 악담을 퍼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아서는 모습에서 어떤 슬픔이 또 화가 치미는 것을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우리의 강퍅함은 우리의 사모함과 비례한다. 오늘 바울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우리가 사는 동안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신뢰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4).”
사람이 제일 추하다. 하긴 개만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놓여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캐릭터들, 피규어가 주는 만족함보다 못하다. 그래서들 서로는 으르렁거리고 비인격적인 관계에 홀리고 끌리고 하면서 그 영혼을 담보 잡히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무안해하고 속상해하는 어린 종업원을 보고, 막무가내인 늙다리 한 무리를 보면서 나 역시 기분이 상하여 속상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쩌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진정한 기쁨, 그 생명의 길을 잃고부터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졌다. 저들도 돌아가면 그만한 손녀나 딸이 있을 터, 어쩜 그렇게들 서로가 어느 한 사람 진정시키지 않고 동조하면서 한 마디씩 거들면서 돌아갔던 것일까? 또 어디서 시끄럽고 무례하게 행세하며 저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갈까? 우리의 기쁨이 기형적이고 기이하게 뒤틀리면서 정작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대접받는 법을 잃어가고 있다. 이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는 오늘의 말씀이 크게 울리는 것 같다. 정작 우린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이런 나를 용서하시고, 이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예수님으로 오시고 날 위해 십자가로 그 모든 죄의 삯을 갚으신 게 아닌가? 이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하심과 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이 귀한 은혜로 살고 있는 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들로 삼으신 바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하다면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린 우리의 잃어버린 인격을 되찾아야 한다.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길거리 카페에 앉아 있다보면 죄다 어쩜 그리도 개를 끌고, 안고, 유모차에 태워 신주단지 모시듯이 애지중지하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저주와 다를 바 없는 막말을 쏟아내고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나름의 보복으로 결제를 취소하고 우르르 몰려 다른 데로 쓸려가는 것이었으니… 주일 예배로 말씀을 전하면서, 아가서를 마치고 하나님의 진정하신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의 충만함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전하였던 것이 현실적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이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우리로 가능하게 하는 기쁨이었으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우리는 과연 믿음의 결국을 살고 있는지? 여전히 믿음을 앞에 두고 갈팡질팡 하거나 세상의 홀림과 끌림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나로서 미처 나만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101:7).
하여 나는 기를 쓰면서,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날마다 매순간 나를 홀리고 끌리게 하는 악을 멸해야 한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어느 한 장면의 오후 한때의 일로 내내 마음이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천천히 아파트 주변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을 보고 모처럼 놀이터에 왁자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한참 동안 서서 지켜보다가 생각하였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0-11).”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이었다.
왜곡되고 와해된 사랑으로 부모가 자식들의 영혼을 짓누른다. 가만히 서 있을 동안 아내는 자신이 가르치는 형제 아이가 둘 다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기로 했다는 말을 건조하게 하였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그 사이에 삼삼오오 모여 서 있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2학년 올라가는 아이가 누가 뭐라 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고, 하고 싶은 대로 가방 싸들고 운동장을 배회하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뭐라 하는데도 교실을 돌아다니다 밖으로 나가고는 하여서 급기야 그리 되었던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엄마는 어떻게 할 줄 몰라 사사건건 아내에게 묻고 울먹이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비인격적인 관계 속의 삶에서 직격탄을 맞는 경우는 아이들이다. 부모의 사랑의 결실이 부모의 증오의 결실이 되었다. 들어보니 이혼은 아니고 별거 중인가, 혼자서 친정 엄마랑 아이들을 건사하는 모양인데… 아, 우리 곁의 상한 심령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답이 없다. 애써 뭐라 권면하면 이대로가 좋다, 하면서 거절하기 일쑤여서, 애를 위해서라도… 언성을 높이려다 그만두고는 한다. 권면이나 위로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이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여 싸우자고 드는 세상이다. 손녀 같은 알바생 종업원 아이에게 그렇듯 악다구니를 쓰고 싶을까? 하여 우리의 답도 하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설령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으로, 이제 남은 생애가 부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우리 안에 더하시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붙들고 살아남기를. 이를 위해 주님은 일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삶으로는 어림없다. 결국 다 자신이 옳다 여기고 자기를 위한 것으로 살기를 원하는 한, 누구도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무서운 것은 정작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실제의 삶과 아무 연관이 없다면 모든 게 다 공염불로 그치는 게 아니겠나? 말씀이 이론인가? 현실인가? 정말 이론과 현실은 다른 것일까?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어서 불쑥, 나를 지배하고자 하는 화가 또 슬픔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온전히 말씀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하는 호소는 수 천 년 전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급히 필요한 말씀이었다. 이는 오늘 바울의 진술과 같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부디 나의 남은 생애는 더는 좌로우로 흔들리지 않으며,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17).” 하여 같이 뜻을 합하고 기도로 합력하여,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 이를 두려워하며 나 역시 언제든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는 이유와 목적이 다른 것이다. 추구하는 바도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주 앞에 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도,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0-21).”
그리하여,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50:7).
이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설마,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1).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2-2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0) | 2024.05.01 |
---|---|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0) | 2024.04.30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0) | 2024.04.28 |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0) | 2024.04.27 |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0) | 2024.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