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전봉석 2024. 5. 2. 04:17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 2:8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우리는 스스로의 주장과 생각에서 놓여날 때 참 기쁨을 느낀다. 당장 느끼는 만족은 자기 생각에 따른 것이 이루어질 때이나 그러기까지 우리의 노고가 너무 심하다. 다들 지쳐서 산다. 사느라 사는 일에 힘이 겹다. 그러다보니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택하며 사는 것인데,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이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요셉의 고백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당장의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주를 바랐던 그는 노예로 팔려갈 때도, 노예로 생활할 때나 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었다. 더러 우리는 어떤 의견이 맞지 않아 갈라서기도 하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의를 이루신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9-41).”

 

당면한 현실 앞에서 우린 쫓기듯 산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도 그러한 현실 앞에서 좌지우지하기 때문이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견딜하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어렵다. 하는 일이나 생각 따위가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하든지 한 길만 간다.

 

나는 자주 노아를 생각한다. 말이 그렇지 저가 견실하게 방주를 지으며 120년이란 긴 시간을 홀로 같은 일을 반복하였을 것을 생각한다. 나로 하여금 지금 이 시간, 이와 같은 묵상과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견실함으로 가능하다. 누가 알아주길, 어떤 결과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하는 어떤 당위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다만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하시는 말씀과 같이 치열함도 익숙해지면 무던해진다.

 

바울은 당당하여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유익 곧 저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 하고 바울은 밝힌다.

 

이 놀라운 전환, 우리의 사는 이유가 남들과 다른 것은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 구약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신약의 여호와 예수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러하기까지 이를 감추어두사 비밀로 삼은 것은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우리로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 아,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이 놀라운 비밀,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 이와 같은 비밀의 감추어진 사실을 알면 알수록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8-10).”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영광으로만이 충만하고 온전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5-19).”

 

알게 하시고, 눈을 밝히시고, 부르심의 소망으로 영광의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드러난다. 그것으로 우리는 찬송한다. 눈물이 또 감격이 벅차올라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송하게 되는 것이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1-12).”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교회는 하나가 된다. 서로는 서로를 응원하고 힘이 된다. 서로 사랑 안에서의 연합이 가능해진다. 이를 지혜는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1-12).” 그런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로 서로 그 뜻이 갈리어서 무릇 서로 사랑하는 일이 그만큼 확실하고 귀한 것이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 3:10-11).”

 

우리가 주의 길을 가는 동안 그리스도,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더욱 새로워져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곧 내가 이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우선으로 놓고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날마다 새 힘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에게든지 이를 권함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이에 미칠 기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면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이를 더욱 귀히 사랑함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저마다 그 관심에 따라 몸은 그리로 향해 가는 일이다. 누가 갑자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서울 어디로 갔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었더니 거기 어느 건물이 경매로 싸게 나왔다고 했다. 그것을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그러기까지 누구 정보를 주고, 이를 얻어 단걸음에 뛰어가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런저런 말로 주를 사랑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떻다, 교회가 어쩌고 하는 말은 힘이 없다. 다만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어쩜 그리들 한결같아서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저마다의 그럴 수 있는 사연과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이 행여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가는 길을 물리거나 되돌리지는 않을지….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0, 16).”

 

정작 때가 이르러 더는 미룰 수 없는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설마, 하고 있을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그러므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늘 아찔하다. 행여 내가 더는 돌아킬수 없는 때에 엉뚱한 곳에 있을지,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지, 두려운 것은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이를 위하여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42, 25:13).” 주님의 이 완곡한 말씀에 주의하게 된다.

 

오늘 바울도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골 2:4-5).” 그러다 보니 세상이 너무 어지럽다. 현혹하는 일이 참 그럴듯하다. 나는 주로 누구의 공격적인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한다. 그게 왜?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게 늘어간다. 하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6-7).” 오늘 말씀은 그에 따른 답을 제시한다.

 

특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8).” 우린 얼마나 저마다의 사고와 그 생각을 우선하며 살고 있는지! 부디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8-19).”

 

이 정도야, 그쯤 다 그러고 사는 것일 텐데… 하고 늘어가는 게 너무 많다. 작은 틈이 벌어지면서 우리 영혼에 차오르는 물이 흥건하다 넘실거린다. 세상 물결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게 왜 나빠? 하고 자녀가 묻고 아내가 다그칠 때, 이미 뭐라 한들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두고 나는 입안에 머금는다. 오늘 말씀은 이에 나무라시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20-22).”

 

결과적으로 이것이 불순종이 되고 우상숭배가 되는 일일 텐데,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3).” 그러한 사실과 현실이 우리가 바라고 붙들어야 하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는 말씀을 구호로만 액자에 걸어두게 한다. 삶은 이상과 다른 것이어서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어느 순간 그 자가 내가 되어있지는 않은지?

 

내가 두려운 것은 괜찮아, 하고 말하는 순간 나쁜 아니라 누구의 영혼도 그릇 행하는 길로 가게 하지는 않을지…. 그러므로 오늘도 싸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오늘도 이를 위하여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말씀이 물으시는 질문에 답을 구하며….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53:1).

 

이에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2-3).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