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위의 것을 찾으라

전봉석 2024. 5. 3. 0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1-2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4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래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난센스 같다. 위에 것이라 하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이를 위하여는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은 되새기게 한다. 생각도 새로운 것을 위해 이전부터 있던 것을 비워야 하는 것일 테니, ‘그러므로’ 하고 시작하는 오늘 말씀의 접속부사는 앞의 내용을 먼저 살펴야 한다.

 

앞의 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세상 철학의 헛됨을 논증하여 현실적인 오늘의 삶을 구체적으로 권면하였다. 바울은 이와 같은 접속부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의 본질이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는 식으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결론적으로 말하듯 강조한다.

 

이에 오늘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즉 ‘~하였으면’ 하는 당위적인 논리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고 이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그러므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

 

곧 우리의 관심과 목적은 영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도 영생이 있어서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러므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가 지금은 ‘아래에’ 사나 ‘위에’ 것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실은 이러한 것들이 우리로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인 것으로, 실은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 곧 이것들을 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어 끌어안고 살듯이 우리 안의 사랑이 우리로 노예를 삼는 게 아닌가? 처음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우선하게 되면서 그것을 우상으로 숭배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므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7-8).”

 

우리 안의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이 우리의 본성을 이루었다. 누구의 어떤 말을 듣다보면 저의 안에 분함이 또는 노여움이 가득한 것을 본다. 어릴 때 겪었던 일부터 현재까지도 그것으로 놓여나지 못하고 악의와 비방과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원망하는 부끄러운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더러는 병적으로 고착되어 정신과 약을 먹고 감정을 조절한다고 하는데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찌르거나 찔린다. 같은 말이라도 상처가 되는 까닭은 그래서다. 어제는 그 일로 아이와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때로는 이러한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회의도 들지만 그럼에도 꾸짖고 나무라며 다독여야 한다.

 

병적으로 예민하여서 그럴 때는 다른 것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장난감 총을 쏘면서 낄낄거리고 떠들자 혼자 궁싯거리듯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뭐라 하였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어떤 이의 무례함도 시빗거리가 되어 다가온다. 그런 점을 지적하며 그럴 수 있으나 좀 더 느긋하고 평안하게 생각하라고 타이른다. 그게 안 되니까 약을 먹는 것일 테고, 그 발단은 공장에서 일할 때마다 거슬리는 아무개가 있는데 그이의 말이나 행동이 괴롭힘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린 저마다 ‘아픈 사람들’이다. 본인들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데, 아이엄마는 서너 줄의 일상을 글로 적는 일도 귀찮은가보다. 아이는 제목만 있고 글은 없는 내용을 적어 올렸다. 성경을 필사하라고 권해도, 책을 읽자고 해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같이 쓰면서 ‘생각나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연습하자고 해도 모두 거절하였다. 그리고 올라온 글을 보며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댓글도 전화통화도 뭐라 할 말이 없어 난감하다. 또 누구는 이제 가타부타 연락도 없다. 먼저 또 연락을 해봐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망설이다 그만둔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어 주의 이름만 부른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 그 한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대한다는 일은 나의 자의적인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내게 말씀은 위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어제도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그러는 동안 회사 누구에 대해 화가 난 듯 횡설수설하여 그대로 가겠다가는 것을 같이 올라와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고 이런저런 말을 들어야 했다. 아이는 ‘아프다.’ 모두는 괜찮다고 하지만 저들이 더 ‘아프다.’

 

우린 모두 ‘상한 영혼’으로 살아간다. 분함과 노여움으로 몸살을 앓듯 여전히 그 안에 억울함이 가득하다. 오늘 본문을 이어서 권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9-10).” 곧 이 모든 일의 해결책은 ‘땅에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생각함’으로 벗어날 수 있다. 이에 시편은 기도하며 찬송하기를,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어찌 그럴 수 있겠나? 하고 생각하면 오늘 말씀에서 답이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2-14).” 결국은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인데, 사랑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평강과 감사로 우리의 노여움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지… 이를 지혜서는 모두 동일한 것으로 여겨 이에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러할 때 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어쩌다 내 곁의 주가 가까이 하게 하신 이들이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스스로 상한 영혼임을 인정하는 데서 서로는 같이 의논하고 위하여 기도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때려죽어도 저들은 바뀌지 않는다. 마치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그러므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어쩌면 스스로 어려움을 인정하고 상한 영혼임을 아뢰는 자가 강하다. 아이가 기특한 것은 스스로 약하고 부족함을 인정하는 강함이 있어서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묻는다. 그럼 난 했던 말 또 한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도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저가 인정하는 데서 건강한 의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은 괜찮다, 옳다, 여기면서 누가 어떻고, 무엇이 문제고, 하여 저들과 다른 자신을 자부하는 자들이 골치다. 정말 문제는 했던 말 또 하는 게 아니라, 더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체 ‘이런 글’을 읽고 무슨 말을 해준담? 또는 자신은 괜찮다는 데 더 무슨 말을 한들?

 

하여 그만 입을 다물고 더는 이를 말이 없을 때 나는 난감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여전히 곁을 같이 하면서 그러는 경우에는 나야말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속수무책이 된다. 이에 오늘 말씀은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그래서 내려지는 결론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이 간단명료한 답을 앞에 놓고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내 자신이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하고 있어서 여전히 어려운 일이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이와 세 시간 가깝게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다 아이가 돌아가고는 녹초가 됐다. 시간을 보니 오후가 다 갔다. 누가 글을 올렸는데, 서너 줄짜리 하나마나 한 내용이라 댓글도 쓰지 못했다. 도대체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와 낙심이 훅, 하고 나를 사로잡는 것 같을 때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그래, 그뿐이다. 위에 것을 생각하는 것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54:1-2).

 

나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는 일, 주만 바라게 하는 상황 속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래서도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너무 일찍 깨고 잠을 뒤척이다 일어나 씻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놀라며 왜 이리 일찍 나가는가? 하고 물을 때,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