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전봉석 2024. 5. 1. 04:40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6-2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6-7

 

 

우리를 향한 창조와 구속과 교회와 화평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었고 만세로부터 만대에 이르기까지 영광의 소망이 되었다. 저는 그리스도시다. 말씀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저들의 악함으로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알고 주를 더욱 바라는 것이었다. 고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사랑도 긍휼도 자비도 모두가 추상적이어서 이를 삶에서 우린 살아서 알게 된다.

 

본인은 기도할 때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말씀으로 가슴이 울컥, 하여 손수건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라 하였다. 기도하며 울음이 나지 않는 것은 굳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구하면서 울 것까지 있는가? 하는 것인데, 심지어 그런 자잘한 것까지 구해야 하는가? 하고 저는 물었다. 나는 바로 답하길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면서 ‘그의 나라와 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막연하고 관념적인 신앙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이 힘이 없다. 먹고 사는 문제로 미주알고주알 주께 구하다 보면 주가 내게 베푸시는 은혜에 감격하게 되고, 그 가운데 나의 이상을 찾고, 이를 위해 힘써 두드리다 보면 주가 예비하신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기도는 주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다 주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시는 것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이에 흐르는 눈물은 그 간격이 너무 넓고 골이 깊어 우리의 죄악됨을 주께 아뢰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다 흐느끼는 간절함이다. 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런데 우린 얼마나 변변찮게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지… 때로는 안 믿는 자보다 못한 삶으로 생을 허비하기도 하고 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에 기도한다. 나의 필요를 구하다 주의 뜻을 알기 원한다. 내 삶의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아뢰다 주가 더하시는 은혜를 감격하게 된다. 나는 친구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밝히며, 스스로의 이해와 납득을 너무 고집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설교말씀을 듣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당황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어찜인가? 하고 저는 물었다. 나는 성령이 하시는 일로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초월하시는 이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우리가 얼마나 완고하고 완악한지. 친구지만 저 역시 자기 아집이 강해 누가 뭐라 하는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집대로 말씀을 듣거나 어떤 질문에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은근히 경멸한다. 그러던 것은 내가 그러해서 잘 안다. 온순하고 착한 듯하나 자기 고집에 누구의 충고도 싫어했다. 말씀을 권하고 바른 신앙을 일깨우면 먼저 토를 달고 삐딱하게 굴었다. 한데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곧 이를 인정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내가 나의 완고함을 알면 알수록 나는 주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게 된다. 나의 아집이 또한 습관이 나를 억누르고 다스리려 할 때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어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어찌 나로 이처럼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가?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 곧 이 놀라운 사실은 내가 아직 죄인일 때,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이 땅에 생겨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이 놀라운 비밀, 신기한 이야기를 누가 듣고 그 이해와 상식으로 알 수 있을까? 두런두런 친구와의 통화와 그 가운데 성경에 대한 질의응답을 통해 내가 새롭게 확신하는 한 가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4-5).” 하시는 오늘 이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어릴 때 아직 철이 없어 그저 싫기만 하던 것들. 가령 설교를 받아쓰게 하셨던 일이나 어린 게 뭘 안다고 죽기 살기로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게 하였던 일들이 새삼 귀하다.

 

그것이 나의 특별한 은혜였음을, 가령 딸애의 혼처나 아이들의 배필을 두고 기도하는 데 있어 물러설 수 없는 조건은 믿음이 있는 자로 그 가정이 믿는 가정이기를 바라는 것인데… 누가 말하길 부모의 그런 게 다 소용없고 부질없다는 말에 나는 동조할 수 없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가 암묵적으로 기본 조건으로 삼는 것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그 어떤 타협도 양보도 옳지 않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아이들 결혼문제만이 아니라 이 땅을 살면서 하나가 허용되면서 나머지도 덩달아서 느슨하고 헐거워져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과 같다. 솔로몬의 노년도 누가 그리 될 줄 알았겠나? 다윗의 방심했던 오후 한때도 누가 그 지경까지 이를 줄 알았겠나? 설마, 하는 순간에 강둑이 무너지는 법이다. 갇히고 묻혀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해도,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누구의 경우 그렇게 방심하였다. 좋다는 감정 하나로 어떤 이를 사랑하고 결혼하여 모든 걸 잃고서 이혼을 하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이의 혼란스런 정신과적 문제와 자신의 극심한 우울증이다. 이제라도 주를 바라며 이것으로 주의 뜻을 깨닫게 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손을 내미는데 저는 ‘이대로가 좋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저의 영혼은 무뎌졌고 안일한 마음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철근 같은 마음으로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해결이 어렵다. 어쩌다 우연히 그리 된, 보편적인 일상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19).”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이제 원하고 바라는 것은 예전에 추구하던 삶의 것과 다르다. 사느라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여 구하는 것 같으나 그와 같은 기도가 어느새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리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이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 이해나 상식으로가 아니라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였다. 하여 이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면 주가 이루신다.

 

그 결과는 이 땅의 것으로가 아닌 더 나은 본향에서의 더 좋은 것으로 말이다. 이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어떻게 저들은 그 모진 시간을 견디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풀린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시험에 앞두고 있는 아들을 두고 나는 주께 주의 선하심으로 인도하시길 기도한다. 어떤 이의 어떤 완고함을 두고 나는 주의 긍휼하심으로 저로 강권하여 붙드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한지,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이 확연한 차이,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14:15).” 이에 우린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13:19).” 참 다들, 저마다의 고집과 아집은 단단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이와 같이 기도한다.

 

그리하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 가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여 이 놀라운 비밀의 말씀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이 놀라운 비밀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 이 놀라운 사실과 오늘도 여전히 그 소수의 ‘남은 자들’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제 나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에 더욱 간절함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생겼으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26-27).”

 

이를 어찌 설명하려다 보면 내가 받은 은혜와 지나온 날의 증거가 나를 강권하심으로 붙드시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 하는 바울의 다짐이 내 것이기를 기도하며…….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6-7).

 

세상의 이런저런 현상을 통해 그 증거를 찾고, 이에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