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0-11
가장 두려운 일은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을 잃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죄를 고하며 ‘내 속에 정한 마음’ 구한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한다. 주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살 때 그 영혼은 황량하다. 오늘 말씀의 다윗도 바울도 이를 알게 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권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7-18).”
주가 정하신 때, 그날을 위하여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2-3).” 주가 주신 그 은혜와 권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이겠다. 친구가 다니는 모 교회는 학교를 인수하였고, 본 교회는 어디 중심지에 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잡음도 별의 별 일도 많은가본데, 나는 그런 일에 더할 말이 없다.
또 누구는 어디 재개발구역 중 하나의 단독건물을 사서 교회를 건축하면 어떤가? 하고 나름은 좋은 의도로 권한다. 그 근처 어디에 무슨 교회가 있는데 아담하게 잘 지어서 딱 그 정도이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저런 생각이야 그럴 수 있으려니, 나는 들으면서 뭐라 말할 게 없어 가만히 있었다. 교회를 이루고 교회로 행하심은 전적으로 주가 하신다. 나는 늘 그 마음의 중심에 주를 생각하며 후원하고 기도하는 이들을 두고 마음에 사랑의 빚을 느낀다.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도 않고 묵묵히 저들이 보내오는 헌금으로 교회를 이어간다. 그때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주께서 그 중심을 아시고 갚으실 것을 바란다.
나에게 교회란 나 하나 주 앞에서 바로 세워져 가는 일처럼, 맡기시는 한 영혼과 그 사연을 두고 같이 씨름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와 같이 묵묵히 주 앞에 나아오는 것.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운전을 하고 올 때마다 되새긴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마음을 이끄시는 대로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쓰고, 그러는 동안 떠오르는 이를 생각하며 저를 주께 고한다. 아주 가끔은 이러고 있는 게 아무런 성과도 없고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서 이 길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것까지도 주 앞에 내어놓으며 나는 모르겠다고 아뢴다. 주가 하실 것이고 이루셨으며 오늘까지 이끄시는 일이었다.
더러는 무모하게 나는 개척을 권한다. 교회로 먹고 사는 문제를 운운하는 일은 경망스럽다. 그러나 주가 책임지실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저 나는 내게 두신 한 가지 일, 주의 전을 지키며 말씀을 준비하고 누구 일로 마음을 끓이다 또 다시 하나마나 한 일인 것처럼 아무 성과도 없이 유야무야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 같으나… 어느 과정 그 구원의 단계 중에 어느 적은 시점을 나로 감당하게 하시는 일이겠으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온 우주를 끌어안는 일과 같아서 주가 저를 위하여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알지 못하나 묵묵히 나는 그 한 점이거나 획이 되어도 그만이다. 그러려니 나는 오직 주를 생각함으로 막연하여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여 나는 친구가 자신이 섬기는 그 큰 교회의 이런저런 행사와 그때마다 일어나는 다양한 일에 대해서 들을 때면 그것으로 저가 오히려 주의 일을 알지 못할까 하여 조심스럽다. 어떤 행사가 있고, 그 규모가 어떠하고, 수많은 이들이 몰려 성황리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혹은 누가 선의의 마음으로 하는 소리겠으나 아담하고 예쁜 교회를 운운하며 투자가 어떻고 뭔가 비전을 갖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할 때면 뭐라 이를 말이 없어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으면서… 문득 오늘 3절의 말씀과 같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이와 같이 ‘멍에를 같이 하는 자’를 주가 또한 세우시는 일이어서 여러모로 나는 부족하고 누추하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내 안에 두시는 이 기쁨으로도 충만하였다. 맞춤하니 누구 손길로 어려운 교회 형편을 그때마다 꾸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이의 세심함에 놀란다. 이런 와중에 교회 임대료를 제때 내는 것도 신기한데 목회자 사례로 적은 금액이나 일정하게 지출할 수 있고, 부채로 안고 있던 것도 매월 얼마씩 해결하여 이제 칠백만원이 남았다. 그럼 오롯이 오백의 보증금이 교회 제정이 된다. 누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겠으나 신앙은 현실이고 교회를 이루는 일은 기적이다.
내가 나의 젊은 동기들에게 개척을 권하는 일도 무모하나 그 가운데서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 생동감이 있어서다. 더러는 아직 아이가 어리고 들어갈 돈이 많아 일정금액 그래서 사례가 필요하여 전임으로든지 파트로든지 여느 큰 교회로 전전긍긍해야 하는 일은 이해한다. 그 또한 의미가 크다는 것도 안다. 그런 가운데 저가 느끼는 회의와 갈등, 마치 뜨내기 같이 또 언제라도 옮겨가야 하는 데서 느끼는 어려움에 대하여는 나는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 없으나 그래서도 개척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소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사역에서 능동적인 자세를 갖게 한다.
하나님과 나의 직접적인 관계가 절실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속 끓이는 게 일이어서 그것으로 기도할 뿐일 때,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 것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나를 채우시고 교회를 이끄신다. 누가 내게 어디 아담한 교회건물을 운운하고 투자 목적으로 어쩌고, 하는 말을 할 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그래서도 나는 누가 후원헌금을 보냈는데도 가만히 주께 아뢸 뿐 저에게 감사를 표하고 인사를 남기지 않는다. 그것으로 서운해 할 일이라면 저 또한 이 일을 감당하지 않았으리라. 나는 그런 확신이 있다. 마치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나는 저들의 심정이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도로 인사를 받고 어떤 식으로든 되갚음을 받는다면 행여 그 마음에 주를 생각함으로 한 일이 사람으로 알려져 어그러질까 하여,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43).” 묵묵히 주가 하시는 일로 나는 받고, 저는 주께서 아심으로 족하였다. 이를 좀 더 확대하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오늘 바울의 고백이 그 진가를 드러낸다. 곧 이러하기까지 저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이와 같은 배움은 주를 신뢰함으로 가능하여서, 더하는 손길이나 이를 주의 이름으로 받는 손길이나 이는 모두 같아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6-7).”
주가 행하실 때 비록 아무런 실적도 없고 남들 보기에 한심할 정도로 답보 상태인 것 같아서, 고요한 수면 아래로 물길은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과 같다. 솔직히 어제는 친구가 교회 일로 자신이 섬기는 교회 목사님에 대하여, 혹은 그 본 교회 담임목사님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할 때 그의 수완이나 남다른(?) 능력을 말하는데 나는 민망하였다. 저의 능력이나 자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가 이 시대에 그와 같은 대형교회의 쓰임을 필요로 하신 일일 텐데, 모여드는 성도들 숫자나 그런저런 행사의 규모에 환호하는 것을 듣는데 불편하였다.
어느 교회는 누구 목사님, 하는 식으로 말이 오가다보면 마치 주객이 전도된 듯 들으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다. 행여 나로 드러날까 하여 내가 주의하는 것은 빗대어 언급할 상대도 아니겠으나,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그러할 것이라 여겨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하여 오늘 본문에서 나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를 주의하게 된다. 그래서도 바울은 이를 모두 주 앞에 돌리고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결국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그러므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 이 귀한 정답을 손에 들고도 우리가 주저하고 쭈뼛거리게 되는 것은 혹시나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가 아닐까? 부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
헌금과 기도로 늘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돕는 손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나의 노력이 보잘것없다하나 이로써 오늘 우리 교회의 쓰임이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한다. 부디 사는 날 동안에 행여 죄로 인하여 나의 구원의 기쁨을 잃지 않기를. 주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는 기이한 재벌기업처럼 교회가 비대하지 않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
행여 내 안에 주가 아니라 내가 드러날까 하는 마음이 혹시 나의 영혼을 가둘까 하여, 그래서도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그러므로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흥해도 그만, 망해도 그만… 이에 결국은 주의 것으로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하다 하여도 혹은 채워주신다 해도 그 모든 일로 주가 이루시는 구원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오늘의 이런저런 모습이 결국은 아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
하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그러므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3, 6-7).
주 앞에 성결, 주께만 온전하여서,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8-9).
그리하실 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0-12).
이로써,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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