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전봉석 2024. 5. 8. 04:24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7

 

 

우리의 시대는 예수 재림이 임박한 때이다. 그때에 나타날 징조들에 대하여는 마태복음 24, 25장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때에 우리가 혹여 거짓에 따를 수 있는 것은 악한 세상을 선으로 바꾸고,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에 “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사 2:6).”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5-8).”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갈등과 반목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려가고, 서로 화가 그 속에 가득하여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 직전과 같다. 특히 도로 위의 난폭함을 목격할 때면 잠시 참음이 거의 불가능한 듯하다. 난리와 난리가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일깨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게 무엇인지 알게 한다.

 

이와 같은 말씀을 알 때 이를 알리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강해지고, 그에 따라 하나님은 들어야 할 사람을 붙이신다. 주를 알고 그 때와 시기를 감지함으로 더욱 간절하게 이를 나누려는 사람에 대하여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라 하신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 24:45).” 이를 찾고 계신다. 또한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25:21).” 주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신다.

 

나는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 딱히 어떤 교제를 따로 가지고 그 교안에 따라 하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다소 무리하다 해도 읽으라, 하고 그에 따라 어떤 의문을 가지게 한다. 스스로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일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몸소 알게 하려 하는 것이다. 정해진 교안이나 그에 따른 문제와 답을 찾아 정해준 성경구절을 찾아 읽는 것은 한시적이다. 나는 잘 모르겠더라도 시야를 넓혀 멀리 또 넓게 보기를, 성령이 우리로 그리 이끄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형화된 생각이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하나님이 더하시는 무궁한 세계를 축소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후 10:15).” 그래서도 나는 아이와 성경공부라 할 때 아이가 읽고 묵상하여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질문을 하길 바랐다. 친구와의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도 그런 의미에서다. 성경을 열 번 읽는 것보다 한 구절을 열 번 되새겨 묵상하는 게 낫다. 그것으로 머리만 커지느니 삶에 적용하여 그리 살려고 하는 게 중요하다.

 

요즘은 몰라서 문제가 아니다. 정보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넘쳐서 문제다. 너무 과한 정보에 오히려 분별력을 잃는 시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정작 자신이 왜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지, 삶과 무관한 지식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지난 토요일 조부모의 제사였다며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제사지냈던 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그 일이 그의 신앙적인 양심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가? 물었다. 여전히 추도예배로 돌릴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는가? 하고도 물었다.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는, 저의 ‘길가’ 같은 마음 밭이 큰 문제이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길가도 포함하셨을까?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이해가 가지만 길가를 어찌 밭에 포함시켰을까? 본래 그 길가 역시 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온갖 사람이 다 밟고 드나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길을 낸 것이다. 형님이 그러자고 하는 데 있어 안 믿는 형제와 늘 그래왔던 습관에서 여전히 그 마음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알고자 하고 말씀에 은혜는 받았다고 하나 삶에서는 여전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겨두는 것이 대수롭지 않는 것이다. 전형적인 문제풀이식 성경공부가 갖는 한계다.

 

주어진 교제에 그 주제에 따라 답을 찾고 성경구절 그 한두 절에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는 형태의 접근은 삶에 힘을 더하지 못한다. 나눔이 없고 실천이 없는 성경은 머리만 커다란 기괴한 괴물을 만든다. 자기 집을 이고 사는 달팽이나 보리새우 등껍질 같다. 그러다보니 거룩은 막연하고 음란은 일상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3-6).”

 

오늘 말씀도 이를 지목한다. 음란이라 하면 세상을 따르는 것으로 그래왔던 관습과 그러려니 하는 습관이 문제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 5:4).” 그것을 비통하게 여기고 괴로움으로 받아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다. 늘 그래왔던 것이니까, 또 그러고 또 그래도 그게 무엇인지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친구에게 북이스라엘, 남유다를 통틀어 어떤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했던 사실을 설명했다.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더러워지니

그들의 행동이 음탕하도다

(시 106:38-39).

 

술 한 잔 정도야… 하는 식으로 허용하는 작은 일상의 세속이 우리로 세상을 경계하지 못하게 한다. 우린 엄연히 주의 것으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2-13).” 그러므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성경이 이론일 뿐 실제와 다른 인생이라면 그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아이와 혹은 누구와 성경공부를 한다 할 때 저가 읽고 쓰고 생각하고 부대끼기를 유도한다. 성경은 주입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렴풋이 안다. 우리를 만드신 목적과 그 계획이 창세전의 섭리였음도 마찬가지다. 사탄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이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어떤 역할이고 의미인지 알게 된다. 때가 가까움을 온갖 적그리스도의 역사로도 알 수 있다. 오늘처럼 교인들과 자칭 그리스도인이 많던 시절도 없다.

 

그때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린 우리의 사고와 이해를 넘어서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주의 날을 상상한다. 그때의 역사를 대비한다. 영적통찰력은 어떤 누구의 가르침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데 그 은혜는 나누고 싶은 열망과 알고자 하는 뜨거움이 서로 끌리고 이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절은 재림이 임박한 환난의 시대인데, 쾌락의 시대이기도 하다. 별의 별 기이한 놀이와 문화가 서로의 이목을 끈다. 성경은 이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예전에 행하던 일과 오늘 새 사람이 되어 행하는 일이 같다면 그것이 기괴하다. 장성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공갈젖꼭지를 물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상이라 하면 미친 거 아닐까? 오늘 바울은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4:2).”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8).” 곧 우리가 저버리고 사는 게 얼마나 많은지 또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성경공부도 좋고 말씀을 읽고 성경을 몇 독 했는지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아는 만큼 살려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종종 친구는 뭐라 설명하면 ‘동의할 수는 없지만’ 하고 말하는데 나는 저의 동의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거면 나 역시 동의할 수 없는 성경과 받아들일 수 없는 여러 내용으로 씨름하기는 매한가지다. 성경은 선포다. 선전포고와 같이 전쟁을 알리는 것이지 우리의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친구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자신이 몸에 밴 생활로 요구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하게 말하였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제사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믿노라, 하고 교회 활동을 운운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교회는 사교나 종교모임이 아니다. 살면서 서로 의지하고 선을 도모하자고 주가 세우신 게 아니다. 모르는 게 불신앙이다. 바로 알지 못하는 게 죄다. 이는 무서운 일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그러므로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 머리로는 아는데 생활로는 여전하면 기형적인 신앙이 오히려 우리 영혼을 지체하게 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우리의 길가 밭 같은 마음은 아무나 밟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열린 마음 어쩌고 하는 ‘니나노판’ 같다. 알씨구 좋다, 하면서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면 굳이 성령이 거하실 마음의 자리는 없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오늘 말씀 앞에 새삼 성경공부의 폭넓은 적용과 실천을 되새기게 된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안다고 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교류는 배교 이상으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이다. 단언하건대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4-15).” 우린 늘 말씀 앞에서 멈추어 자신을 삶을 갈아엎어야 한다. 굳어진 길을 걷어내고, 응어리진 돌밭을 고르고, 가시떨기를 걷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로 더욱 주를 바라고 알게 하심은, 이로써 내 곁에 들어야 하는 영혼을 붙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나로 알게 하심과 내 곁에 붙이시는 영혼의 조화는 또한 저로 알게 하심으로 저에게 붙이셔야 할 영혼이 있음이다. 우리의 관심은 영혼의 일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7-18).” 나는 오늘 말씀으로 이를 더 확신하면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59:1, 5).

 

그러할 때,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9,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