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전봉석 2024. 5. 10. 05:16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살후 1:3-4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 61:2-3

 

 

괜히 기쁘고 기분이 좋은 것은 누구에게 권할 때, 함께 성경공부를 한다거나 저가 행하던 그릇된 습관에서 벗어나려 할 때이다. 내 안에 그리 권하고 나누려는 마음과 저의 안에 그것을 따라 행하려는 마음이 성령이 더하심이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재림을 준비한다는 미명하에 생업을 작파하고 무위도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혹은 광신적인 열성으로 주의 재림만을 외치며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거기에 거짓 선생들은 한술 더 떠 이미 예수 재림이 이루어졌다고 외쳤다. 성도들은 혼란스럽고 더러는 갈피를 잡지 못해 거짓 교훈에 휘둘렸다.

 

이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1-2).” 바울은 서둘러 축도의 글로 시작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3-4).”

 

우리가 서로 섬기는 교회는 다르나 믿는 이는 하나이고, 우리가 각자의 생활은 다르나 믿음으로 생활하는 이유와 목적은 같다. 이에 ‘믿음이 더욱 자라고,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인내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동일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곧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5).”

 

오늘 우리가 주를 바람으로 당하는 여러 어려움 각자의 수고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이를 갚으심이다. 즉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6-9).” 이를 앎으로 우리는 하나이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서로 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면 갚으심을 얻는 일이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그렇듯 우린 하나가 된다. 각자의 하나님이란 각각의 삶에서 서로가 느끼고 감사하는 내용에 있어 서로 다르나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친구는 아픈 모녀와 함께 휴일에 백화점에도 가고 같이 차도 마시면서 교제하였던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아이가 그 와중에 출근 전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로는 다른 일 같으나 하나의 마음으로 기뻐하며 잘하였다고 지지한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그렇게 우리의 신앙은 확장하고 믿음은 자라는 것이어서, 주후 50년 경에 세운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바울은 저들의 믿음이 자라고 있는 소문을 듣고 기뻐한다.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로 서로 지지하고 응원한다.

 

아이와의 성경공부가 혹은 친구의 곁에 있는 가족에게 마음씀을 두고 기뻐한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곧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서로 다르지 않아서 사랑의 교제는 주 안에서 서로를 사랑함이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서로의 믿음이 자라가고 그 신앙이 확대됨으로 같이 기뻐하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특히 서로 잘 아는 터라, 내가 나를 보면서 내가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 놀라는 것 같이 놀랍다.

 

아이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한 일이 왜 자랑하고 싶은 일인지, 친구가 모처럼 휴일에 아픈 모녀의 가정을 건사하며 같이 백화점을 갔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그와 같은 교제의 시간을 보냈네, 할 때에 잘하였다 하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것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믿음의 착한 양심을 격려함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린 자칫 파선할 수 있다. 그릇 행하여 배교의 자리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우린 매일 자신에게 선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씀으로 자신에게 선포하지 않으면 역으로 자신이 요구하는 바에 이끌려 육의 소욕을 따르게 된다. 나는 가감 없이 고백하기를 나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영혼은 없음을 고백하였다. 내가 제일 어렵다. 내 안에 이는 온갖 요구와 소욕으로 때론 죽을 맛이다.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쏟아지는 잠 같이 우리 영혼을 옭아매는 게 얼마나 많은지…. 나아가 나는 친구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의 형에게도, 누구보다 대하기 어려운 장성한 아들들에게도, 때로는 물러서지 말고 선포해야 한다고 일렀다. 제사에 대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주일을 어기고 그릇 행하는 일에 대하여 아들들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선포하지 않지 않으면 요구 당한다. 이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실제 나 역시 이와 같은 나로 인하여 얼마나 씨름하고 또 다투기도 하는지,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없어 주 앞에 엎드리길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둘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은 저마다 절규하며 다투어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인정하였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이는 곧 스스로에게도 하는 소리여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바울이 인정하는 바울 자신과 다르지 않다. 우린 모두 그러하여 누굴 어찌할 수 없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지 못함으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하루가 내게 당하는 꼴이었으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하여 베드로 역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어찌 우리가 아무렇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나?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어려움을 겪으며 혹은 마음의 갈등 사이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도 일이다. 특히 나는 육신으로 약하여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도 자주 지치고 힘에 겨워 짜증이 또 화가 날 때도 있다. 이를 인정함으로 나는 견딜만 할 때를 감사한다. 주초에 내내 비가 내리고 날씨의 영향인지 몸은 저 혼자 들들 볶는 가운데 이만하면 움직일만하다 할 때 설교원고도 작성하고 누구와 통화도 한다. 억지로라도 새벽에 깨워 교회로 기를 쓰고 올라오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다들 인정하지만 한 번 허용하고 하나를 예외로 두면 덩달아 다른 욕구들도 들고 일어나는 꼴이라, 나는 스스로에게 선포하듯 절대 바꾸지 않는 것이 새벽에 일깨워 나를 교회로 오르게 하는 것이다. 와서 도로 자는 게 일이라 해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고 말씀으로 글쓰기를 하게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첫 번째 일이다. 다음은 은근히 싫지만 또 억지로라도 붙드는 마음인데, 이 두 마음은 매순간이 싸움인 것 같다. 아이가 퇴근하고 그냥 간다고 하면 걱정되면서도 좋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이가 오고 안 오고에 따라서도 긴장한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어떤 어려움, 문자적으로 옥에 갇히는 것 같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누구에게 연락하거나 예전처럼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리하여 주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여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우리의 선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찾는 일일 테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바울의 이 놀라운 진술과 자신과의 치열함으로 나 역시 주 앞에 외치며 구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시 7:12-13).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실력이다. 주의 권능이란 주를 경외함이었다. 내가 나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은 내가 요구하는 내 속의 소욕이 악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5-8).”

 

하여,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61:1-2).

 

나의 나 됨을 인정할 때 주의 도우심을 바라며 외치는 것이어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3).

 

때로는 내가 내게 원수라. 나를 이길 수 있는 나는 없다. 나는 이러한 표현으로 친구와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는 이들마다 저들로 자신에게 선포하게 한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우리가 주를 인정하며 산다는 일은 그러하여서,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