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전봉석 2024. 5. 22. 04:09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3-5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 73:24-25

 

주를 바로 알고 온전히 섬기는 데 있어 항상 힘써야 함을 생각한다. 오늘을 살면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사는 일은 하루하루의 삶으로 충실하였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곧 임하게 될 나라와 그의 나타나심을 목전에 두고 사는 일, 이렇게 하루씩 노아의 그 긴 방주의 세월은 다 채워진 것이 아닐까?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그렇듯 모두는 저마다의 삶에서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것 같아 더러는 우리 마음을 더욱 어렵게 하기도 한다. 하여 오늘 시편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 또한 우리가 애써 수고하며 당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면서도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잘만 살아가는 세상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며 말도 안 되게 저 혼자 구원의 방주를 짓고 있다는 게 얼마나 무료하고 지난한 일이었을까? 무려 120년을 그와 같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그럴 수 있는 무던함과 온전함은 “이제 후로” 있을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으로밖에는 지속할 수 없는 것으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하는 오늘 바울의 이와 같은 확신이 값지다. 모두들 안이하고 나른할 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때까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음으로 더러는 우리의 수고가 헛될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73:17-19).

 

결국 그 때가 이르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이로써 우리가 알 것은 저들의 그러저러한 것은 우리로 경계를 삼게 하려 하심이다. 저들을 쫓아 간 데마와 같이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방주, 말씀을 되새기며 이를 전파하는 일에 힘쓰는 것으로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내게 두시는 이에게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을 전하는 게 일이었다. 하여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더러는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을 때도 이를 준비하는 일로 하루의 방주를 지어가는 일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달콤하고 그럴듯한지, 때가 가까울수록 저들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모든 게 이치에 맞는 듯하다. 먹고 사는 일에서부터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믿는 자들의 무모한 선택이 설 자리가 없다. 저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바른 길을 신중히 가려하지 않는 데 대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이것이 오늘 세상의 역할이고 점점 더 하나님을 부정함으로 세상의 책무를 다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저 묵묵히 하루를 감당한다. 오전에 있을 성경공부에서 아이가 궁금한 성경구절 서넛을 카톡에 올려두었다. 운전을 하고 나오면서 이 구절을 되새기고 그때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이는 세상의 일이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어느 때보다 자기주장이 우선하는 시대를 살면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우리는 다만 주를 바람으로 노아의 무던하고 성실함과 바울의 다짐과 투철한 믿음으로 다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누가 물으면 나는 그저 행함으로 다한다. 이러는 게 어떤 의미로 무슨 소용이 있을지는 내 몫이 아니다. 다만 주가 나로 두신 곳에서 내게 보내시는 이를 마주하고 그 시간을 묵묵히 주의 이름으로 감수하며 살아내는 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세상이 어떻고 남이 뭐라 하든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은 믿음은 하루씩 분절로 들어차서 채워져 가는 날들이다. 현재를 사는 것. 지난날에 대하여 떠올리는 후회와 낙심도, 앞날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와 헛된 희망도 없이 다만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어서, 이는 견딤이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가 같이 성경공부를 할 때나 어떤 대화를 나눌 때, ‘만일~ 하였더라면’, 혹은 ‘가령 ~하여서’ 하는 식의 가정법에 얽매이는 질문이나 고민을 듣는다.

 

특히 성경을 두고 그러한 내용으로 추정하려 할 때 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얼마나 알까? 성경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이 말씀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하여 나는 저들에게 묵상을 자주 강조한다. 성경을 다독하는 것도 좋으나 깊이 또 오래 머물며 되새기기를…. 왜냐하면 우린 점점 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신기하지? 정작 듣자고 하는 소리는 못 듣고 보자고 하는 데는 시선이 닿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꾸 더하여 이런저런 가정을 얼키설키 더하다 그물이 되어 빠져오지를 못한다.

 

다 그렇듯 저마다 이고 지고 사는 아픔이 있다. 어떤 이는 그저 아픔으로 이를 노여워하나 어떤 이는 이것으로 주의 은혜와 천국을 사모하며 산다. 그럴 때 우린 지금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0-11).”

 

데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을 가까이서 돕고 함께 하던 자이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골 4:14, 몬 1:24).” 그러했던 이가 어쩌다 다른 길을 선택했는지… 바울은 이를 ‘세상을 사랑하여’라고 표현하였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믿는 자로 살면서도 적당한 선에서 세상 연락을 즐기며 동시에 교회의 교제도 놓지 않는 현대인들의 적당함이 더러는 위태롭다. 분명 성경은 일러,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가 있다. 사망이 생명 갖고, 저주가 축복인 것 같이 세상은 그리 돌아간다. 하여 시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73:11-14).

 

상대적으로 저들과 비교할 때 우리의 한 날은 헛되고 허무한 것 같다. 허황되고 무모하다. 그러니 생명과 사망이 분간이 안 되고 복과 저주가 어느 것이 옳은지, 세상은 요지경으로 혼재 돼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남의 취향과 선택과 저들이 쏘아 올리는 개인방송을 보면 상대적으로 우리 삶은 비루하고 고리타분하기까지 하다. 그런 가운데 우린 여호수아와 같이 결단해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누가 뭐라든지, 세상에 드러나는 현상은 어떠하든지,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더러는 잘 되던 일도 안 되는 것 같고, 기껏 애쓰다 어느 순간 내가 다 망친 것만 같을 때, 또한 공연한 일을 한 게 아닐까? 하고 회의가 밀려들 때 말씀은 나를 불러세우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누가 뭐라든지, 오늘의 상황은 어떠하든지, 나는 묵묵히 또한 무던하여서 주만 바라고 주의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가기를. 그러할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7).” 그러므로 확신하기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8).” 이와 같은 믿음의 결기로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17, 20).

 

하여,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3-25).

 

그리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