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딛 1:15-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하나님 앞에 깨끗하기란 있는 그대로 주가 더하신 가운데 사는 일이다. 현재를 사는 일이고 말씀을 의뢰하며 사는 일이다. 어제는 말씀을 같이 나누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하신 말씀에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실제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부류로 이해했다. 하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변화산에 올라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과 더불어 엘리야와 모세를 본 사람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실제 다시 사신 예수를 제자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문자 그대로 ‘오늘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도 해당이 된다. 이는 우리가 살면서 이전의 나와 오늘의 나의 변화된 모습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신 것’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저들의 특징을 오늘 본문으로 다시 읽으면, “깨끗한 자들”이다. ‘죄 씻음 받은 것’을 몸소 체험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신 것’을 살면서 삶으로 인정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깨끗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뭘 해도 저들은 만족함이 없고 그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오히려 닿는 것들마다 더럽게 여겨진다. 처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시간이 지나 서로의 관계나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 삶은 가증하고, 복종하지 아니한다. 결국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딛 1:15-16).
나의 일상으로 보면 예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확연히 다르다. 누구를 좋아하고 어떤 것을 추구하던 가치관이 달라졌다. 주어지는 현실에서 있는 것으로 주가 더하심을 인정한다. 때론 그것이 나의 약함으로 병적이나 그 또한 더러는 약을 먹거나 억지로라도 견뎌보면서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가령 어제는 엔진경고등이 들어와서 미리 예약한 된 날로 자동차 정비소를 가야 했다. 나의 병명은 범불안증이라 하는데 이게 참 애매하다. 더러 앞뒤 맥락도 없이 공황을 느낀다. 불안이 엄습하면 숨쉬기가 가빠지고 식은땀이 난다. 배가 아프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폐쇄나 강박, 고소공포나 우울까지… 그야말로 나의 증세는 설명하기 어려운 범불안상태이다.
왜? 하고 이유를 묻는다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날은 괜찮은데 어떤 날은 심하다. 특히 어제와 같이 미리 예약된 시간에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해야한다는 일은 그 자체로 불안하다. 얼굴이 옥죄고 맥박이 뛴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짓눌린다. 그런 가운데 태연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냥 괜찮은 척… 나는 일부러 책을 꺼내들고 한 자 한 자 집중하여 읽거나 핸드폰으로 묵상글을 펴서 다시 잃거나 하는 것으로 진정시킨다. 그러는 동안 나는 긴장하여 의식적으로 주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이 늘 입에 뱄다.
그 일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일찍 안정제를 챙겨 먹었다. 인데놀 10mg과 자나팜 0.25mg을 평균 하루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을 먹는다. 새벽과 저녁에는 리보트릴 0.50mg을 같이 먹는다. 이는 임의로 약을 네 개로 쪼개서 40mg짜리 인데놀을 10mg씩 자나팜 0.50mg을 반으로 나눠서 그리 복용하는 것이다. 나름은 용량을 조절하고 더하거나 빼거나 하면서, 그에 따른 내성과 부작용을 최소화한다고 하는 것이다. 담당의는 몇 번 그와 같이 임의로 조작하여 먹지 말라고 하다, 그러는 게 오히려 본인이 조절하는데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소분된 약들을 가방과 차와 집과 교회와 심지어는 열쇠고리와 목걸이로 언제 어디서든지 필요할 때 찾을 수 있게 준비해두었다.
어디를 가야 하는 날은 앞서 그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일반이다. 익숙하다고 여기는 곳에서도 감정은 저 혼자 요동칠 때도 있어서 나는 때로 나를 어려워한다. 어제도 나가는 길에 분리수거를 챙겨 지하 3층에 버리고 갈 거였는데, 층마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순간 불안이 일어 그걸 그대로 차에 가지고 다녔다. 특히 누구와 함께 움직여야 할 때는 저를 살피느라 나의 긴장은 몇 배로 증가한다. 실제 아내와 나의 성향은 달라서 아내는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준비하고 다급하게 움직이고, 나는 일찍 준비하고 먼저 시작하는 경우라 이제는 서로가 각자 그리하다 어느 지점에서 만나거나 따로 한다.
그런 가운데 목회란 거의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것 같다. 누굴 마주할 때면 저의 말과 그 사정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과잉감정이입이 일어나기도 하여, 오죽하니 그런 나의 마음을 연애하는 사람 같다고 여긴다. 요즘은 이런저런 이유로 줌으로나 전화로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솔직히 덜 어렵기도 하다. ‘아픈 아이’가 오는 날이면 이제는 편하고 가장 자주 만나는 사이인데도 어렵다. 이번 주간은 서로가 감기몸살까지 겹쳐서 못 만나다보니 하루 종일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평온하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께 아뢰며 초막 셋을 짓고 싶은 심정이다. 그럴 때면 주님은 임의로 나를 사람들 속에 섞어보내신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귀신 들린 아이’를 마주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나는 매순간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같다. 혼자 있으면서도 더러는 긴장을 하는데, 나는 이제 왜? 하고 묻지 않는다. 답이 없는 싸움이다. 아픈 날은 그냥 아프면 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유익하다. 이 또한 주가 더하신 것으로 인정하면 죽을 것 같지만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그러다 바람이 잦아지고 구름이 걷히고 해가 뜨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안정감을 느끼고 비로소 상황파악이 이루어져 긴장이 풀릴 때의 느낌 같이, 쉼이란 그런 것일까? 안식의 나라를 나는 그리 상상하고는 한다.
나의 이런저런 상황을 나열한 이유는 이 모든 게 죄의 결과로 생겨나는 여러 증상 가운데 일부란 사실이다. 인정하든 안 하든 모든 질병은 아담이 선사한 죄의 결과다. 육신의 모든 고통은 물론 정신적 어려움이나 마음의 질병도 그러다. 그뿐인가? 사람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오늘 딱 우리들 모습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고 단호하게 외친 것이다(딤후 3:1-5). 그런 가운데서 오늘 나의 약한 육신과 어려운 심적질환을 사랑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날'을 산다는 은혜를 그때마다 체험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갈망하고, 바라게 되는 '주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름으로 간절하여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이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는 사실, 오늘 시인은 그리 알고 외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시 74:1).
곧 이 모든 나의 날들을 겪으면서 나의 ‘왜?’는 하나님을 바라는 쪽으로 시선을 두고 ‘무엇!’을 구하게 된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요셉은 알았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특히 고난을 상징하는 인물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런 가운데서 비로소 주를 찾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천국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주의 권능으로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그러므로 주를 인정하는 것인데,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2-3).
오늘 나를 어렵게 하는 것으로 내가 주를 바라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하여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곧 하나님은 모든 것을 파멸하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 나로 소생케 하신다. 하루 가운데 반복되는 회복을 이루심으로 주의 능력 안에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그리하여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4-5).
고난이 감추고 있는 환희는 놀랍다. 이를 알고 바울은 소망을 이루려한다고 하였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래서 오늘은 아픔 또는 적당함으로 나의 날은 감사로 채워진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74:16-17).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를 앎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이에,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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