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전봉석 2024. 5. 25. 04:48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딛 3:3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어떤 일로 누구 일을 생각하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듯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이 주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3, 4-7).”

 

그러므로 기억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2).” 하심은 우리로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게 하신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에 따라 바울은 우리로 순종하라 권고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하며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하고 설명을 더하였다(4).

 

하여 우리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는 말씀의 의미는 주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린 천국 시민인 동시에 평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빌 3:20, 딤전 2:2).”

 

이 땅을 살면서 시민으로써의 복종과 사회참여에 대하여 언제든지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어야 함이다. 저들에게 비방과 악담의 빌미가 되지 말고,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 6:4).” 이와 같은 자세는 예수께서 우리에 보이신 실제의 생활이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그러므로 ‘다투지 말며’ 하는 것은 싸움이나 선동에 관여하지 말고, ‘관용하며’ 즉 자기의 이익이나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어려운 자를 돕는 자로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하심이다. 즉 우리가 온유한 자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능하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내하며, 정중하게 행하는 실제의 생활을 말한다. 우리 주님이 그리 사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이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도 대략 다르지 않다. 모세도 그러하였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다윗도 마찬가지로 시므이라 하는 자가 저주하며 따라올 때 이를 공격적으로 방어하려는 수하에 일러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저들은 모두 주를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였다.

 

신약의 스데반은 말씀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저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바울 또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

 

저들이 공통적으로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함이고(갈 5:23), 예수님의 팔복이 있는 자로 온유한 자들이었다(마 5:5). 온유함은 우리의 최고 덕목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의뢰함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어떠하든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정하는 데서 온다. 곧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

 

이는 우리 또한 예전에 어떠하였는지, 이교도와 다를 바 없이 주를 멀리하고 살았던 것을 되새기며 이제는 구원받은 자로 영생의 소망을 가진 상속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온유가 가능하다. ‘우리도 전에는’ 즉 이와 같이 주 앞에 서기까지 나도,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이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하여 순종할 수 없었다. 본질상 불순종의 자녀였다. 이에 속은 자였고, 멸망의 길로 가던 자였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누가 지금의 자신에 대해 갈등할 때 우리의 신앙 이전과 이후를 자주 언급하게 된다. 친구에게도 그러면서 오늘에 저가 새벽예배를 가고 성경공부를 참여하여, 교회 일에 열심인 것을 알게 한다. 전에 같으면 이미 그만두고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하려 도로 그 생활로 갔을 텐데, 저도 실은 오늘 그러고 있는 자신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며 놀라워한다. 우리는 그렇게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그것이 우리 삶의 증거가 되었다.

 

이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곧 구원은 성취되었고, 이미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 이미 우린 구원을 받았고, 완전한 구원의 성취를 향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달려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이는 구원의 근거와 전제 조건이었다. 구원은 결코 우리의 도덕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성경은 이를 수차례 강조하신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6-17).”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와 같은 말씀들을 찾아가다보면,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산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해진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주어진 것임을 말이다. 긍휼하심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이다. 이미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리셨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그러므로 예수 믿고 중생의 삶을 산다는 일은 죄를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덧입은 것이다. 이는 증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곧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를 우리 주님이 중개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오늘 아침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가며 새삼 내게 부어주긴 주의 은혜가 크고 놀라운 사실 앞에 감격한다. 그래서도 더욱 ‘성결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데,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됨’을 생각하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4-7).” 이 놀라운 은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린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하여 현재의 고난에도 기꺼움으로 동참한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이를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이 말이 미쁘도다.’ 감사와 감격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단과 부패함을 피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시 76:2).

 

오늘 여기, 나의 한 날에 더하시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7).

 

그러므로 내가 품고 살았던 나의 노여움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