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전봉석 2024. 5. 26. 04:06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몬 1:4-6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 77:12

 

 

우리의 삶이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것이다. 이는 늘 바울의 자랑이며 늘 소원하는 바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와 빌 1:1, 딛 1:1)”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도 자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 외 갈 1:1-2, 고후 1:1, 엡 1:1, 골 1:1, 딤전 1:1).” 등.

 

이와 같은 맥락으로 오늘 본문은 자신을 ‘갇힌 자’로 소개한다. 나는 자주 나 자신을 ‘붙들린 자’로 여길 때가 있다. 내 스스로도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주를 멀리하고 도망치듯 요나와 같이 다른 길로 가려다가 ‘붙들린 자’와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한다. 그처럼 자신을 알 때 오늘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쓰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갇힌 자’로 표현함으로써 실제 3차 전도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이기도 하였다(주후 53-58, 행19:21, 21:15, 25:11).

 

이는 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일어난 일로 디모데를 보내는 자로 하여 이 글을 쓰면서 디모데와 빌레몬 사이에 친분을 밝힌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을 수신자로 하여 실은 ‘오네시모’를 관대하게 대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하였다(몬 1:2).

 

이는 저들이 빌레몬의 집에서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실제 오늘에도 교회가 어디 상가를 얻을 형편이 안 되어 가정에서 두어 가정 이상이 모여 예배드리는 경우도 많다. 가정에서 모일 만큼 그 숫자가 적을 수도 있고 여러 형편과 사정으로 예배를 위해 교회의 한 일원이면서 또한 그리할 수도 있다. 물론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처소를 사용하고 있으나 나는 동기들 중 누가 개척을 생각할 때 가정교회에서의 출발도 권한다.

 

교회는 우리 개개인의 성도 그 자신이며,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임으로 마주하여 예배하고 주의 일을 준행하는 것임으로 여느 건물의 어떤 형태의 교회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오늘은 ‘도망간 노예였던 오네시모의 문제’가 단순히 빌레몬 가족만의 이해와 사랑으로서는 물론 서로 인정하고 교회로서의 일원으로 받아주기를, 주의 사랑과 도우심으로 권고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자주 쓰는 인사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은혜는 헬라어 ‘카리스’로 인사할 때 ‘카이레인’ 하며 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카리스’는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죄 사함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율법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된 모든 ‘실제적 축복’은 기쁨이다. 그 ‘평강’의 헬라어 단어 ‘에이레네’는 ‘샬롬’이란 인사로 평안을 나타낸다.

 

에이레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로 인해 원수 관계에서 카리스로 변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관계’를 의미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러므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에 따른 화해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되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하는 ‘은혜와 평강’의 진정한 의미를 확대한다.

 

그러므로 우린 이제 서로에게 바울과 같이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몬 1:4).” 곧 더는 서로가 남이 아니다. 몸이 약한 누굴 위해 더 약한 누가 간구한다. 내 형편도 어려운데 누구의 어려운 형편과 사정을 두고 주께 구한다.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우리 안에는 있다. 이때의 하나님은 ‘내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인격적이며, 이에 따른 ‘너와 나’의 관계 또한 인격적인 관계가 되었다.

 

더는 서로가 남이 아닌, 저의 아픔으로 나의 아픔도 견딜 수 있다. 바울은 그와 같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처지는 어떠하든지, 어디에서든지, 누구 일에서도 주의 은혜와 평강으로 다가간다. 이는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주 예수와 성도를 향한 것으로 교차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주 예수를 향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겠다. 믿음이 사랑 앞에 놓이는 것은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생각함이다. 그때에 나타나는 결과가 감사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3-5).”

 

그런 사랑으로 오늘 바울은 중재의 서신을 쓴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우리의 사랑은 ‘믿음의 교제’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따른 증명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하는 기원으로 하여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나는 이처럼 말씀이 말씀으로 연결되며 서로를 증명하는 것을 볼 때면 감격스럽다. 마치 모두의 시대와 그 일생은 달랐어도 서로는 한 하나님을 의뢰하였고, 이를 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증거가 되었던 구약의 수세기 동안의 역사를 볼 때처럼 감탄한다. 곧 우리의 믿음에서는 서로가 달라도 동일하게 ‘자비로운 사랑의 행위’가 나온다. 이는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5).”

 

하여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3:34, 15:12).” 하시며 명령하셨다. 곧 우리가 선을 알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유하게 된 영적인 선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이다.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영적 선물과 축복’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의 서로 사랑함은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서로가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하는 표현과 같이 누가 주의 일에 자신을 던질 때 크게 감동하고 응원하고 도전을 받는다. 가령 내가 친구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실제 생활에서 성도의 삶을 권면하는 것 같으나 그로 인하여 내가 새 힘을 얻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의 ‘상한 마음’과 그 심령을 두고 씨름하다 저가 주의 길을 바로 가려 마음을 다할 때 이보다 보람과 즐거움은 없다. 신기하지? 상대적으로 아무리 권하고 또 애원하듯 해도 요지부동인 누구와 어제는 길게 통화하고는 마음이 어려웠다. 저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지겨워하는 듯한 말투를 들으며 속상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리 강요하는 사람은 아닌데도….

 

혹은 누가 그대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자신들의 가정에서 자신들이 홈스쿨링으로 지금처럼 그냥 하겠다고 했을 때, 또는 ‘아픈 엄마’가 자신의 문제도 뒷전이고 ‘아픈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적극적이었으면 하다 전달이 되지 않을 때의 속상함이라니! 우리가 서로 불쌍히 여김과 자비와 사랑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서 나의 감정은 주의 자리로 나아간다. 나의 내면의 세계가 저로 인해 확장된다. 이는 역설적인 사건이다.

 

나의 ‘개방과 솔직함’이 주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3:12, 7:4).” 이에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 그러니 나의 솔직함은 나를 개방하듯 ‘환자이나 환자를 맞는 목회자’로 저들 앞에 당당히 드러낸다.

 

누가 어떻게 소개를 듣고 나에게 연락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어려움과 모자람과 연약함을 드러냄으로 상대가 어려워하고 숨기려하며 부끄러워하던 것을 직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또한 서로가 그렇게 주 앞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때 용감해진다. 물론 현실은 여전히 현실이나 우리 영혼은 든든하여서 ‘주가 아신다!’는 인식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이에 믿음은 무모할 정도로 정직해진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후 3:12, 엡 3:12).” 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어쩌면 우리의 능력은 남들보다 약함이다. 나는 어느 아픈 아이와 그 부모를 볼 때마다 은혜롭다. 아이가 사춘기가 올 정도로 다 자라서 성장하였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목에 관을 꽂고 옆구리로 음식물을 주입하며 살아가는 그 자신의 ‘살아냄’이 숭고하다. 이를 주께서 두신 사랑의 기회로 받아들여서 젊음을 다해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건사하며, 주신 바 오늘까지그 상황에 충실하였던 집사 내외를 볼 때면 경이롭다. 저들의 능력이면 자신들의 이상과 삶을 위해 아이를 어디에 맡기고도 얼마든지 사회 활동을 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주가 허락하신 날을 살아내는 일, 나는 요즘 그러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주께 순종함으로 각자 ‘갇힌 자’로 사는 일이겠다. 어제도 오후께 혼자 산책을 하다 어디 길거리 카피에 앉았다가 누나와 통화하다 ‘그 아이’가 사춘기가 왔다며 화상으로 인사라도 하라고 해서 아이와 집사님 내외와 모처럼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물었다. 아이의 키는 훤칠하게 커서 앙상하였고, 다리는 휘청거리나 서서 얼굴을 화면 가까이 들여가 보며 알아보는지 어쩌는지….

 

지난주간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다 무슨 이야기 끝에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으로 지나치게 열심인 친구에게 나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를 비유로 들며, 저는 그저 부자의 집 앞에서 하는 것도 없이 인생만 허비하다 죽은 것 같으나 주의 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그런 그가 한 일이란 <살아냄>이다. 주신 상황 그대로 거지로, 헌데를 앓고, 몸을 가눌 수 없는, 비루한 인생에서… 저의 이름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았을 뿐인 나사로는 그의 견딤이 곧 섬김이었고 순종이었고 믿음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앞서 ‘저 아이’와 그 부모의 생이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늘 저들은 새삼 나의 삶에서 감사를 쏘아올리는 신호가 된다.

 

우리의 ‘마땅한 일’이 무엇이겠나? 마땅하다는 헬라어 ‘토 아네콘’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뜻한다. 그럼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무엇이겠나? 주의 사랑을 인하여,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노여움을 풀어내는 일, 주의 은혜로 주신 상황의 난처한 지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내는 일,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해산의 고통’이 인생이다. 사는 거다. 주신 바 오늘을 형편대로, 주신 상황에 감사함으로 충일할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갇힌 것은 몸이나 그 영혼은 더욱 풍성하였고 활발하였다. 나는 저들 두 내외의 신앙과 ‘아픈 아이’의 살아냄이 곧 ‘복음의 전파’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고, 어느새 집사내외도 나이 50이 넘어 중년이 되기까지 ‘맡기신 바’ 그 한 영혼으로, 주의 기업을 감당하며 사랑하였던 것이었으니…. 우리가 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로 산다는 일은 나라를 구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일 이상의 가치와 선행으로 어느 훗날 주의 품에 안길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함으로 저들을 보면 경이롭고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영접하는 삶이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이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고후 7:15-16).”

 

하여,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이와 같은 신앙의 결실로서의 하루다. 주신 그대로, ‘붙들린 자’로 혹은 ‘갇힌 자’로도 기꺼이…….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6,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