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 5:12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6-7
어쩌면 우린 ‘단단한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젖이나 먹어야 할 자’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는지…. 말씀을 전하거나 듣는 데 있어 주의할 것은 ‘내 의견’이 아니다. 전하는 자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여야 하고 듣는 자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더러는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처럼 혹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하는데, 옳지 않다.
하나님은 옳다, 아니다 하실 뿐 성경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그럴 수 있지, 서로 다른 것이지… 하고 허용하는 순간 사탄은 그 틈을 노린다. 말씀은 관용의 이상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7-9).” 하는 증거에 주목하게 된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 무엇에 대해 설명할 때, 그건 너의 생각이지… 하면서 자신의 다른 생각을 말한다. 또는 어떤 말씀에 대해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여지를 주기 원한다. 그럴 때면 단호할 필요가 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말씀일 수는 없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린 바울의 견해를 듣는 게 아니다. 베드로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동의할 수 없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전하는 자로 더러는 나 역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저한다. 어찌 내가 주의 것이겠나? 하는 반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가령 어제는 오전 출근 전에는 아이와 점심시간에는 친구와 줌으로나 통화로 성경공부를 했다. 가령 성가대를 한 달에 한 번만 서는 일에 대하여 더 잘 준비해서 그리한다는 것인데, 나는 잘하고 못하고 그 중심이 중요하지 않겠나? 하고 말하였다. 물론 나름의 이유와 그럴 사정에 대하여는 그럴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우리가 주 앞에 드려지는 것은 어느 일정부분 충분하다 여겨질 때 그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하든지 주님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는 한 층을 개인기도실로 꾸미는 데 있어 그 예산을 두고 서로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그럴 때 나는 목사님의 뜻을 따르라고 권했다. 예산이 들고 그만큼 소요시간과 부수적인 문제가 따르겠으나 ‘그런 일’에서 서로가 갈리는 것은 좋지 않다. 이를 말하거나 저를 설명할 때 나 역시 믿음으로 아멘, 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말씀 앞에 우리는 예만 있을 뿐이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오늘 말씀은 그에 따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하는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을 우린 어찌 이해할 수 있는지? 또한 그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하는 부분은 의아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란 ‘배우다’의 뜻이 ‘고난 받다’의 동사 어근과 같아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셨음으로 그 순종의 과정에서 고난도 당하셨다는 해석으로 읽힌다.
즉 주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삯을 대제사장으로서 감당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구속하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다. 곧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고난에 따른 순종이 아니라, 순종에 의한 고난을 감수하심이다. 그렇게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철저히 복종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자기를 믿는 자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심이다.
곧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할 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으로의 사역이 아니라,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한다. 이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3:8, 62:1-2).
하는 찬양과 기도와 같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0-11).” 우린 이미 우리에게 부여하신 주의 영으로 인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 이와 같은 내용을 두고 묵상한다. 그러니까 묵상하고, 성경 공부함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심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시간으로 주께 화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
우리가 주 앞에 순종할 때 순종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게 된다. 더러는 성경을 설명하고 저의 일상의 면면을 두고 말해야 할 때 주저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때도 있다. 친구여서 더 어렵고 아이여서 주저하게 되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전해야 하고 외쳐야 할 때, 더러는 그와 같이 내버려두는 것도 포함이 된다. 더는 순종하지 않을 때 이를 나로서 강제할 수는 없다. 곧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하여,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53:3).
설마 내가 저보다 나은 게 있어 전하겠나? 내가 더 선하여 주의 종으로 삼으셨겠나? 우린 더러 임의로 바람과 같이 임하시는 주의 영이 부담스럽다. 그리 불가항력적으로 이끄실 때는 따르면서도 어렵다. 그래서도 복종이 되는 것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친구여서, 또는 가족이어서 말씀을 전하기가 더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또한 내게 맡기신 일이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전하는 자로 서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주가 하라 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내고 생각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더러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내가 먼저 부끄럽고 송구하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책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다만 나는 구할 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달리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여러 번 권하고 또 바라여도 이를 마다할 때 나로서는 별 수 없다. 주의 뜻을 따라 주께 나를 내어놓듯 그 모든 일에서도 주의 뜻을 따를밖에.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는 나의 복종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더러는 알다가도 모르겠으면서도, 받아들기 힘든데도 묵묵히 준행하는 일. 복종은 그렇듯 나의 의견이나 주장을 뒤로 하게 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탐탁지 않아도, 내 뜻은 다르다 해도…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그러므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 아, 이 놀라운 복종의 끝에서 경건을 마주한다.
자, 이제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12).”
나의 미숙하고 여전히 어리석음을 돌이키며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2:6-7).
나로 귀히 삼으신 주의 놀라우신 뜻을 묵상하며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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