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전봉석 2024. 5. 29. 04:3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 80:19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로 곁을 같이 하며 사는 일은 복되다. 안 믿는 세상에서 안 믿는 자들과 견주며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 비록 연약하나 믿음으로 하나 된 자들이 있어 힘이 된다. 이에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하여,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가 함께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2-3).” 하고 이어지는 말씀 앞에서 나의 오늘 나 됨을 다시 되새긴다. 이에 우리가 그의 집이 된다는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

 

우리가 끝까지 잡아야 하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은 무엇일까?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 그리스도인으로 지녀야 하는 이 소망으로 우린 먼저 담대함을 갖는다. 담대함은 신뢰로 가질 수 있다. 주가 함께 하실 것이란 신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란 신뢰, 그리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신뢰, 이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우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진다. 이를 자랑함은 그리 믿고 사는 실제이다. 우리의 행함은 믿음으로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된 나는 이제 이 거룩한 신분을 자랑스러워한다. 집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저들은 유대인들로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에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집이 되었다. 이것에 대한 확신과 자랑이 우리로 인내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고, 말씀만을 붙잡고 나아가게 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것으로 우리는 하루 동안에 만나는 이들을 주의 이름으로 대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하여 누구와 통화를 하든지 어떤 일로 만나든지 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나도 저의 이야기에 일부가 된다. 저와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어 주를 나타낸다. 이를 위하여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가능하다. 우리가 함께 거룩한 형제가 된다. 그럴 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면서 나의 나 된 것으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는 오늘 말씀 앞에 좌정하게 하신다. 여전히 완고함은 남아 있어서 다른 말로는 예전과 다를 게 없다. 처음에는 성경에 대한 궁금증과 열심으로 점심때마다 전화로 성경을 나누던 친구는 이제 습관적으로 전화를 한다.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기 위한 시간이 아닌데… 하는 아쉬움으로, 요즘은 성경에 대해 궁금한 게 없나? 하고 물었고 저는 그렇듯 바쁘고 아프고 이런저런 일로 성경을 못 읽는다고 하였다.

 

임의로 어찌하자할까 우선은 그런가, 하고 두었다. 나는 그 시간을 내기 위해 다른 것을 미루거나 그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 한데 저는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걸음을 따라 전화를 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말에서 나는 신중한데 저는 번잡스런 도로의 소음이 아무렇지 않은가보다. 다른 이야기를 위해 그러는 시간이면 애써 그 시간을 낼 게 아니다. 어제그제도 가급적 다른 시간과 겹치지 않게 하는데, 그러기 위해 신경 쓰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이어져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일부러 내는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지나는 길에 혹은 운전하다 심심해서 하는 식의 만남과 통화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다. 어쩌다 그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이의 만남을 위해 기를 쓸 것이 없다. 우리의 ‘함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전 같이 그저 편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시시덕거리자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린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나는 그렇게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저에게 난 특별한 존재이길 원한다. 나에게 저와의 시간이 특별하여 준비하고 이를 위해 앞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른 일도 겹치지 않게 신경 쓰고, 위하여 먼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 나 역시 그런 사람이기를 원한다. 우리의 시간이 그런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저 별로 도움이 될 게 없는 일상의 평범한 수다는 가끔의 것이지 그렇듯 특별히 시간을 내고 애쓰는 시간의 범주가 아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조만간 그런 마음을 말해야 할까, 하고 생각중이다. 나는 여러 번 그런 일로 서로가 소원해지는 경우를 보았다. 그럴 때면 괜히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크다. 가령 아이가 오고, 일주일에 한 번 그렇게라도 저들과의 만남을 유지했어야 하나 싶은 안타까움이 아직도 크지만… 무엇에 대해 권함을 곁을 내어주는 일이다. ‘함께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저 막연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이는 소모적일 뿐이다. 나는 여러 번 권하고 신중하게 부탁하였고 저들은 그럼에도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 그리 행하는 일이어서 그렇다면 더는 같이 할 수 없었다.

 

친구와 성경을 나누기 위해 빼 둔 시간도 나는 의미 있고 가치 있기를 바란다. 그저 가벼운 수다를 원하는 것이면 일부러 그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함께, 거룩한 형제들로 묶이는 이 놀라운 하나 됨은 그저 그러다 마는 그런 관계의 너와 내가 아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서로에게 그런 자가 아니면 굳이 몰라도 되는 일, 듣고 금세 잊어도 되는 말들로 시시덕거릴 게 아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사도가 되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그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두루 다니셨고, 어떤 이를 마주하셨고, 이르셨고,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저 가벼운 사이는 가벼운 만남으로 시간에 쓸려 날아갈 뿐이다. 결국 이 일은 우리 의지로 하는 것은 아닐 텍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에 나는 오늘 말씀에서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하는 말씀 앞에 신중하여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하심이 감격스럽기만 하다(6). 그러할 때 우리 마음을 예전처럼 완고하게 두지 않는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8).” 그냥 두면 언제든 황량한 모래언덕 같은 마음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그렇게 나는 이제 예전에 즐기던 일과 사람과 시간들을 경계한다.

 

특히 친구가 많아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나로서는 이제 극히 제한을 두어 절제한다. 결국 광야에서 죽은 이들은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9).” 그러므로 믿지 않거나 다른 것을 믿는 이와는 교제를 피한다. 서로의 일상적인 대화가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 그렇듯 말과 말 사이로의 관계는 허무하다는 것을 이 나이쯤 되면서는 알 것 같다. 말은 그저 말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그러나 더는 그 일을 경계함으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나는 이제 이를 붙들고 저를 놓고 살고 싶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으로 애지중지하며 허비하는 것을 멀리한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나의 약함은 내가 잘 아는 터라,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6-7)

 

결국 오늘의 나는,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5).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