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7-28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4
새 언약에 근거하여 예수의 보혈을 강조한다. 옛 언약에 따라서는 율법으로 선하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성령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면 더할 수 없는 의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그러므로 나의 우매함을 인정할 때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하루를 살면서 드려지는 마음과 생각으로 주의 뜻을 바람은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가 아닐까? 누구와 성경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에게 더하셨던 날들이 얼마나 기이하고 감사한지… 그때는 알지 못하던 것을 두고 오늘에서야 감사와 찬송을 올리고는 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산다는 일은 그 어떤 광야에서도 ‘예비 된 첫 장막’에 머무는 것과 같다. 곧 하나님을 바라고 주의 부르심에 합하여 산다는 일은 어떠하든지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것이어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이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돌아보면 그러하였다.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다 성경을 암송한다고 하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려서 그 한계를 두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어릴 적의 기억으로 두 눈을 잃고 서로들 모여 앉아 성경테이프를 틀어놓고 늘 일정한 시간과 반복으로 성경 전체를 통째로 암송하던 이들을 생각하였다. 그저 대단하다 할 일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의 자리였다. 남들이 보면 불쌍하고 한심한 자리 같으나 저들은 그 자리를 축복의 자리로 알고 주께 감사하였다.
우리의 어떤 어려움, 그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씨름하다 그것이 낫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축복인 것을.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여 우리로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시는 것, 더러는 실패이고 질병이고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좌절의 자리인 것 같으나,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6-17).”
그와 같은 말씀으로 우린 오늘 이 막장 앞에 서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곧 말씀으로 말씀 앞에 설 수 있어야지 말씀으로 세상을 사는 수단을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 믿는 이유가 고작 이 땅에서의 형통함으로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그저 막연하여서 교회도 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의 일과로 여기는 어떤 이에게 나는 그 영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여러 선택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주를 향한 간절함을 가질 수 없다. 그 심령은 가난할 리 없다. 애통함을 회피한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줄도 할 줄도 모른다. 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을 리 없다. 저에게 신앙과 믿음은 그저 막연할 뿐이어서 어느 정도면 족하다. 그러므로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 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 거처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에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들의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 13:19-20).”
그러니 늘 사는 게 지옥이라. 피로와 긴장이 끊임이 없다. 늘 바쁘고 쉴 틈이 없다. 가만히 앉아 주를 바라며 묵상할 기회가 없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하신 주의 음성을 듣다,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알았다. ‘화 있을진저’ 이 놀라운 경고가 오늘의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는 사실로 이사야서 5장을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그런데 이 무슨 일인지,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2).” 즐거운 마음으로 수확할 때에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놓고 절규한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4).” 그 원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수고와 그 애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첫째,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여야 만족함을 누릴 수 있을까?
둘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스스로의 만족과 위로로 자신을 즐겁게 하려하나 공허함뿐이라. 오히려 그 일로 주가 하신 일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
셋째,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대체 우린 얼마나 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속고 살아야 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만족하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 거짓은 더 큰 거짓으로 치대고 막아야 하는 것으로 오히려 더 유치하다.
넷째,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를 두고도 우린 외면하며 한사코 사람들의 일시적이고 단회적인 문제로 덩달아 씨름한다.
다섯째,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그렇게 스스로는 옳다, 괜찮다, 하는 동안에 그릇 행하는 일에 대하여는 대책이 없다.
여섯째,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그러니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극렬한 것을 원하며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산다. 그뿐인가? 그것으로 선과 악은 뒤바뀌고 공의는 사라진다.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23).”
월요일이면 돌아오는 주일의 설교 본문을 읽고 무작위로 초안을 작성한다. 그러면서 한 주가 가는 동안 어느 날은 문장과 단락을 다듬고 처음 잡았던 주제가 하루하루 그때마다 바뀌기도 하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어찌 열어보이시는가, 하는 문제는 일상의 소소한 갈등과 기대와 누구의 사연과 저와의 대화까지 버무려지다 주의 소리를 듣고, 그러는 동안 원고는 작성된다. 나의 한 주간은 단조롭고 그 동선은 일정하다. 더러는 답답하고 한심할 정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친구나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고 누구의 기도부탁에 위로와 약속을 건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으로 나는 결국 하나님 앞으로 간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어떤 날은 어디가 아프고, 또 어떤 날은 어떤 마음으로 안정제를 도 많이 먹으면서 견디고… 때로는 견디고 버티는 일이 지겨워서도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은 갑절로 커지기도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살아서 산 자로 사는 일은 옛 언약으로가 아니라 새 언약으로였다. 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후 8:9, 11:7).”
저는 누구신가. 날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이제는 누구와 성경을 나누다, 나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의 날들 가운데 그 증거를 설명하다 내가 자주 주의 은혜로 감복한다. 은혜의 비례는 나의 죄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 주가 나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 그 사랑은 결코 막연하지 아니하였다. 젖 뗀 아이가 찾는 엄마의 품속 같이 평안함이었다. 그러므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에,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86:1, 3-4).
주 앞에 바라는 것 한 가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부디 더는 나의 남은 생이 이 말씀으로 벗어나지 않기를.
하여,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6-7).
할 때에,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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