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히 12:28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시 89:14-15
모처럼 산본IC까지 달려갔다가 왔다. 전에는 매일 다니던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새벽 이른 고속도로 위에서 속도는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들었다. 무슨 여과장치 때문에 한 달에 두어 번 30분 이상 주행속도를 높여 달려줘야 한다는, 어떤 첨단 기술로 인해 엔진경고등이 들어오면서 듣게 된 해결책이었다. 거의 십 수 년을 매일 다니던 길이었는데 새삼스럽기도 하고, 길은 길로 이어져 새로 난 길과 맞닿았고 이를 알리는 음성이 조용한 실내에서 혼자 설명하고 있었다. 좋아졌다는 세상에서는 그만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요구하는 것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그렇게 다녀온 길이 얼추 한 시간은 걸린 것 같다.
말씀 앞에 앉아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음을 되새기다, 저들 또한 그 시대마다 새로운 무엇으로 어떤 변화를 겪으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가끔은 나 혼자 뭐 하고 있나… 싶은데 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하였을,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하고 오늘 말씀이 심란해하는 나를 불러 세우시는 것 같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앞서 간 선진들은 물론 예수께서도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말씀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허다한 증인들이 그토록 증거 하고자 하였던 게 무엇일까? 저들은 어찌하여 숨 가쁘게 이 길을 달려간 것이었을까? 곧 자신들의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였다. 이는 곧 오늘을 사는 우리 믿는 자의 길이기도 하여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하나님의 증거를 붙들고 이를 또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사는 일에 우리들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이는 명령이면서 동시에 도로 위에 놓였을 때 주어지는 숙명과도 같다. 때로는 나란히 달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구간마다 정해진 속도 규정에 따라 이를 성실하게 따르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 도로 위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렇듯 어떤 일을 하고 어디에서 무슨 상황에 놓였든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증거 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증인은 경험을 토대로 한다. 나는 분명 처음인 것 같은 길인데도 계통발생에 따라 앞선 선친의 발걸음으로 이 길 위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를 찾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아닐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5-26).”
곧 믿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안 믿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그 원론적인 차이를 생각하다, 닿을 수 없는 생각은 저 혼자서 긴 한숨을 내쉬고는 한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추론해보면 저는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므두셀라는 심판을 경고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다. 에녹은 이를 두려워할 줄 알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동행은 이루어졌다. 실제 므두셀라가 죽던 날 노아의 방주가 닫혔고 하늘이 열려 비를 쏟아냈다. 오늘 시편은 이를 두려워할 줄 앎으로 경외하고 경외함으로 찬송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시 89:7-9).
이에 에녹은 물론 노아의 순종도 가능하였고, 아브라함의 믿음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되었다. 하여, 오늘 본문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3-5).” 하고 우리의 힘을 돋우신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고난은 성도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표현과 같이, 어제는 설교원고를 거의 작성하고 가느라 조금 늦게 나섰는데, 오늘 우리를 향한 <화 있을진저!> 하고 외치는 이 외마디 비명 같은 경고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예전에는 그렇듯 듣기 싫어하던 소리였으나 이제는 크게 들리는 이유를 안다. 나의 지난 길 위에서 주가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생각하면 모든 게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 심지어는 나의 지옥 같았던 학창시절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찬송이 된다.
하면, 세상의 화려한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킨 것 같이 오늘 우리를 사르려 입 벌리고 달려든다 해도, 오늘 우리는 굳건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믿는 자들로 줏대도 없이 이리 옮겼다 저리 붙었다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확신이 없을 때 바람에 나는 검불처럼 쓸려 다닌다. 저마다 교회를 탐방하듯 옮겨 다니는 시대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는 워낙에 크고 이름 있는 교회여서 그런가, 어느 교회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오기도 하고 우르르 쓸려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평소보다 꽉 찼다 싶은 예배시간이 몇 주 계속되다 또 어느 주일에는 휑하니 자리가 빈 것을 느끼곤 한다고 했다.
다들 어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서로 아는, 아름으로 어떤 이를 따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는 것이어서, 뭐라 하기도 그렇고 그저 막연하게 서로는 ‘친절한 타인’으로 족한 사이로 전락하였다. 언제부턴가 성도의 교제는 힘이 없다. 마른 풀이 흩어지듯 힘주어 서로 가까이 하면 으스러져 흩뿌려지듯 사라진다. 그런 모습을 보며 친구는 가끔 회의가 들기도 하는지, 뜬금없이 어떤 어려움을 물을 때 나는 그때마다 일희일비할 거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 때도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였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우리로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킬 능력이 없다. 언제든 그 마음을 낚아채려 마귀는 틈을 노린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이 틈은 아주 미세하고 사소하여서,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스스로가 허용할 때 순식간에 그 틈을 타고 들어선다. 그리고는 우리를 세상 속으로 끌어당긴다. 보면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세상이 참 좋다.
오후께 집으로가 아내와 같이 장모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갔다. 장모는 요즘 부쩍 지난날 어느 시점의 일을 자꾸 끄집어내어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한다. 어제는 수십 년도 더 지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8천을 맡긴 이야기를 했다. 두서없는 말이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때 맡긴 얼마를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서 얼마쯤 돌려달라고 할까 하는, 나는 곁에서 아내가 곁들이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은 잘 알지 못한다. 전후 맥락을 종합하면 그 돈이 오롯이 장모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모의 것이어야 했다? 아무튼 아흔의 장모는 반이라도 돌려받아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것인데, 오히려 그런저런 구술에 휘말려 엉뚱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나는 장모에게 지난날의 일은 그냥 두시라고 말하였다.
그 연세에도 세상이 참 좋은 것이다. 좋은 세상에서는 돈이 필요하고, 예전의 그 돈이 새삼 아까웠던 것인지 딸과 아들에게 핀잔을 듣는데도 장모는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다만 얼마라도 돌려받으면… 하면서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쏟아지는 말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럼 목사님에게 묻고 답을 듣자, 하고 아내가 장모를 이끌어다 내 앞에 앉히는 바람에 나는 길거리에서 한 시간 넘게 그 사연을 들었고 뭐라 일러 ‘오직 앞으로의 예수의 바라보시라’ 권하느라 진땀을 뺐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는 그릇된 길로 간다. 이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나는 장모의 남은 생을 염두에 두고 ‘그런 데’ 한 눈 팔 시간이 없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요즘은 가끔적이면 지난날의 이야기 금지, 옛날 일 회상 금지, 의도적으로나마 장래를 생각하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기!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면서 장모에게 권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러므로,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사 5:30).”
주가 나와 함께 하셨던 날들을 묵상하고 되새김으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곧 오늘이 더하는 어려움을 징계로 받아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녀 사랑을 묵상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녀들로 세상과 같이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이에 따른 역설적인 사랑이 우리로 주를 경외하게 한다. 하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28).” 나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89:1).
그러할 때,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7).
그러나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13).
이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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