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 2:6-8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 102:15-16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은 저 혼자 어려워진다. 이때 우리 앞에 두 길이 있어 주를 바라거나 다른 길을 모색하거나 한다. 이단의 사설은 이럴 때 극성이다. 진리에서 벗어난 길은 이단으로 향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다른 복음은 없다. 사는 데 따른 무던함은 의가 된다. 노아는 다만 주가 명하시는 대로 방주를 지었다. 이를 의로 보신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은 무던함으로 승부가 난다.
유일하게 롯을 의인으로 칭하는 오늘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교훈으로 삼고,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의인이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한다.’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여러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곁의 불법한 행실들이 너무 많다. 이를 보고 듣다 우리 영혼이 상한다. 이를 통하여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9).” 우리로 지키신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아침 일찍 가족 카톡방에 아들이 회계사에 이어 세무사 시험에도 떨어졌다고 알렸다. 괜찮다고 위로하다 점심께 집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일찍 가서 카페에서 마주앉았다. 시무룩한 아들에게 주가 함께 하심을 말해주고, 앞으로의 이런저런 계획을 들었다. 무얼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만 했다. 나로서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 후회가 더 많아 나는 지금 저의 눈부신 날을 축복하며 무얼 하든지 주가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였다. 처음으로 그렇게 둘만 서로 앉아 이런저런 얘길 했던 것 같다. 우리 곁에 너무 많은 철학과 헛된 속임이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9-10).” 그러면 우리는 이를 알고 주 앞에서 사는 것이 복이었다. 나는 나의 어리석었음을 인정하면서 주의 은혜가 크고 놀라웠음을 자신한다. 어느새 서른 하나, 서른 넷,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 무슨 말을 길게 할 게 없었다. 들어보고 그러는 가운데 주가 저를 지도하심을 믿었다. 우리 가는 길을 주가 아시나니, 나는 아들의 실패와 좌절을 축복한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확신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세상에 놓인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갈 바를 안다. 장성하여 다 큰 아들에게나 딸에게는 굳이 할 말이 없다. 나의 사는 모습이 저들과 함께 있어 이를 보면서 스스로들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지, 오늘도 어찌 우리를 도우시고 붙드시는지,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살아가는 모습이 교훈이 되어 이를 보고도 깨닫는 게 없다면 무얼 더 말해 무엇 하겠나? 이는 내가 남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어떠하든지 주가 함께 하심을 누구보다 곁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에게 일러,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더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구하려 하기보다 혹은 돈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주를 바람으로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나의 어리석었던 지난날들이 이를 증거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내 자식이지만 저 또한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을… 나는 그리 은연중에 알게 하려 하였다. 우리가 가장 잘 사는 비결은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며 사는 삶일 거였다.
곧 오늘의 나의 부족함도 교훈이 되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언제부턴가 나는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려 한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더러는 이와 같은 말이 허공을 맴도는 것 같을지라도 다들 잘 살았다, 싶은 사람들도 주 없이 허무와 공허로 노인이 되어 죽음을 기다린다. 인생의 가장 눈부신 날에 나는 부디 저의 날들이 주를 향하여 온전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우린 다만 주의 자비하심으로 산다. 노아나 롯이나 저들이 한 게 무언가? 하고 짚어보면 더욱이 롯의 경우는 의롭다 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오늘 성경은 저를 의인이라 하신다.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이러한 기준이 의아한데,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나 역시 다를 게 없지 않나? 싶은 것이다. 하여 주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결국 노아와 롯이 주는 교훈은 묵묵히 주를 바람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한 것뿐이다.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가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는 의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언제부턴가 내 자식 일로 마음을 졸이거나 염려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우려가 없지 않지만 주께 맡김으로 오히려 오늘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들고 씨름하는 일이 더 크다. 주께 아뢰며 고할 때도 주를 알지 못하고 멀리하는 이 한 영혼을 위함이지 가족이나 자식들에 대하여는 주가 함께 하심을 믿고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주를 향한 마음이 우리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신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3-16).”
어찌 이와 같은 마음이 가능한가? 할 정도로 나는 덤덤하였고, 아들의 심정을 헤아리다 그 또한 주가 더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려 하심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로써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이 우리에게는 넉넉하다.
세상이 헛된 줄 알 때 우리가 추구하며 사는 삶의 목적은 뚜렷해진다. 주가 인도하심을 알 때 오늘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의 여러 형태는 주가 뜻하신 바에 따른 것이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7-18).”
세상 볼 거 없다. 무얼 하고 안 하고 자신이 결정하는 일 같으나 돌아보면 나의 짧았던 지난날에도 내 뜻과 무관하게 주의 뜻이 주도하셨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허물과 실수까지도,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이에 우린 주께 아뢸 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1-2).
비록,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1-12).
나의 날들로 내가 주를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아이의 실패와 좌절로 주가 더욱 저를 사랑하심을 알 것이다. 매순간 좋은 것을 두고 바라며 기도하지만 더 좋은 것으로 주는 갚으셨다. 그때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3).
살면서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5-16).
모처럼 아들과 마주앉아 두어 시간 커피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 나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으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김으로,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21).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7-2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누림이라 (0) | 2024.06.22 |
---|---|
여호와를 송축하라 (0) | 2024.06.21 |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0) | 2024.06.19 |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0) | 2024.06.18 |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0) | 2024.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