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4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의 서신이 에베소교회와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졌다. 바른 신앙의 정립이 필요하였던 것은 풍미하던 이단과 각종 사상에 대한 혼탁함 때문이었다. 우리 기독교는 실체가 분명하다. 이를 요한은 강조하며 시작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가 믿음으로 신앙을 가지고부터 이 말씀을 우리는 듣고 보고 느낀다. 각자의 삶 속에서 저마다의 현실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우리는 직접 그 실체를 산다.
주후 90-95년에 쓰인 이 서신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60여 년이 흐른 때로 다른 사도들은 거의 순교당한 뒤 요한만이 남았을 때 쓴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교회는 여러모로 위기였다. 특히 이단의 득세와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회를 위협했다. 특히 영지주의의 발원은 헬레니즘을 근간으로 하여 범신론적인 우주관과 윤리적 쾌락주의가 성행함으로 기독교의 모든 규범을 위협했다. 이에 요한은 노년에 이르러 기독교의 근본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서신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실체적 진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1세대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이를 느끼고 보고 만지며 산다. 오늘 시편의 찬양도 그러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4).
하며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열거하는 시인의 시선은 생생하다. 우리의 믿음은 그와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로 이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하심으로 만나주신다. 과학적 근거나 추론을 기반으로 하는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이 성경의 시간을 무력하게 하려하나 우리의 믿음은 저들이 알 수 없는 실체를 근거로 한다. 이는 신비나 허구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기이하여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하여 우리의 최대 근거는 오늘 요한이 증거 하는,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를 어찌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이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점심때마다 친구는 성경을 읽거나 듣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하는데, 어제는 에베소서 2장을 같이 읽으며 설명해주길 바랐다. 친구는 천천히 읽었고 나는 같이 성경을 보면서, 결국은 너와 나를 향하신 말씀이지 않은가? 하고 되물었다. 문맥이나 어휘를 어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가리키고 있는 상대가 곧 나와 나로 우리의 젊었던 시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렇지 아니한가? 묻자, 그랬지! 하고 저는 대답하였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3-5).”
우리가 같이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 안의 어떤 뜨거운 죄책과 부끄러움이 일고 상대적으로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앞에 감사가 저절로 넘쳐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울컥, 하고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나? 너와 나는 죽었던 자들이다! 죽어 마땅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임은 당연하다고 말하자 친구는 또 같이 그렇다고 하며 이를 인정하였다.
이 놀라운 실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딱히 당대의 직접적인 제자들과 예수와 직접 함께 했던 세대들만의 고백이 아니다.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우린 이렇듯 살았다. 그리하여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하시는 말씀이 곧 우리의 실상이었다. 이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하실 때 우린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행이라 여기며 감사할 수 있는지, 오늘 요한은 이를 알게 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오늘 우리가 ‘더불어 누림’은 무엇이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수천 년 전 성도의 신앙이나 오늘 우리의 신앙이나, 직접적으로 예수를 보고 듣고 느꼈던 1세대들의 성도들이나 오늘 우리의 보고 듣고 느끼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안다. 하여 오늘 요한은 우리의 이 기쁨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4-5).”
이를 우리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충만하게 안다. 앎으로 서로 고백하고 감격한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이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하는 대목에서 친구 또한 아하, 하고 새삼 놀라워하고 감격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우리가 그러할 수 있는 것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우리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화두로 긴 긴 시간을 묻고 듣고 생각하고 서로 고백하며 입으로 시인하지 못했다. 내가 주의 강권하심으로 붙들려 신대원을 하고 글방에서 예배를 드리며 교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친구는 이 또한 돈벌이로 여겨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로 나의 마음을 찌르기도 하였다. 어쨌든 구색을 맞춰야 손님들도 오지 않겠나? 하는 저의 조롱 섞인 지적에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영업을 운운하며 교회도 장사로 여겨 접근하던 저가 몇 년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던 저가 그때부터 매월 후원헌금을 보낸다. 나는 부탁한 적 없고, 고맙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이는 저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스스로도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가지고 산다. 이 은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우리가 무얼 어찌 노력하여 얻어낸 게 아니다. 우린 앞서 죽었던 영혼들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그런 우리여서 누구도 자랑할 게 없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나는 친구가 이 본문 에베소서 2장을 같이 읽고 설명해주길 바란 것도 신기하고, 22절까지 한 구절 한 구절을 또박또박 읽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어느 대목에서 가책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서로 주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신비다. 허구 같은 사실이다. 꾸며낸 말이라도 이 정도로 믿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길라잡이가 되는 것은 풀어 설명하는 자나 이를 듣고 깨닫는 자나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낌이다.
이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별로 와 닿지 않던 말씀으로 흘려듣던 것이 이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 같이 생생하다. 이에 우리가 주를 송축함은 자연스럽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104:1).
이것이 단지 수천 년 전의 아무개가 쓴 시로 그치는가? 오늘에 이르러는 너와 나의 고백이 되어, 우리의 생로병사는 물론 자연의 모든 변화와 계절마다의 태동은 새롭고도 놀랍다. 이에,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2-5).
서로가 이제 같은 것으로 충만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격려하고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전에 알던 서로가 아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 놀라운 감격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104:24).
이는,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0).
그리하여,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33-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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