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4. 6. 21. 04:26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0

 

 

말씀을 듣고 행할 능력이 필요하다. 이에 송축하는 삶이 가능하다. 그러려면 우리 안의 순결을 깨워야 한다. 마음이 청결할 때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이를 듣는 것이 권능이다. 베드로는 두 편의 서신에서 이를 강조한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이를 누군 더디다 하나 우린 늘 재림 신앙으로 산다. 이를 생각함으로 깨어있을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이 이를 주도한다. 깨끗한 마음과 생각으로 진실한 마음을 일깨운다. 하여 우린 진리에 선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우리는 ‘진리에 선 자’들이고 우리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1-2).”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어떠한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저들의 악함으로 산 교육을 받는다. 베드로는 우리 인생을 늘 돌아보게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곧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도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오늘 우리가 여기, 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보여야 하는 사명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부패하고 죄악 중에 있다 해도,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13-14).” 이때에 우리의 삶이 곧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15).” 이에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 저들로 내가 믿는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인데, 심지어는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권세 잡은 저들을 존대하라고 한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17).” 저들이 우리 힘들게 하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해도 저들의 권세는 주가 더하신 것으로, 저들의 악함으로 우리의 의로움을 단련하신다.

 

실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주후 64년의 베드로는 이듬해 65년에 네로 왕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 64년에 네로는 로마를 불 지르고 이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덮어씌워 모진 박대를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터키를 중심으로 각지로 흩어져 뻗어나갔다. 저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은 전파 되었고 기독교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는 그런 네로 왕을 존대하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 그리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주의 섭리는 의롭다 하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로 하여금 연단을 통해 산 소망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이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바로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즉 놀랍게도 내가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영접하기 전에, ‘아직 연약할 때에’ 하나님은 앞서 이 일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모든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세상은 악하고 악한 것으로 권세 잡은 이들을 존대함은 저들로 우리가 주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니, 그러하기까지 저들은 우리의 안전을 알리는 경고 표지판 같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그러하고 앞서 노아의 때가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베드로는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5).”

 

일부러 잊으려 하는 그들을 우리는 이길 수 없다. 현대 신학이 또는 강성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정화하고 악과 맞서 싸우려하나 저들은 저들의 사명을 다할 뿐이다. 애굽의 바로 왕의 역할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괴롭혀서 단련하는 ‘주의 종’이었다. 그 쓰임을 다하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가까운 훗날에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9-10).”

 

궁극적으로 저들의 끝은 불못에서의 영원한 영벌이다. 우리는 이를 앎으로 저들의 오늘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 역할을 다할 뿐이어서 우리로서는 그에 따른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함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 그것이 육신을 괴롭게 하는 질병일 수 있고, 애써 수고하였으나 실패와 좌절일 수 있다. 억울한 누명과 모함일 수 있고, 악의적인 공격과 모멸일 수 있다. 그런 저들을 맞서 싸워 우리가 이겨야 하는 게 아니다. 저들은 저들의 역할을 할 뿐이고,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주를 더욱 바람으로 더욱 더 산 소망에 이르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저들의 쓰임은 그때까지이고 그것으로 우리는 마치 훈련하는 병사와 같이 혹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와 같이… 오늘의 이 고단한 삶을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우린 어떤 어려움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나의 하루도 그러하여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때론 힘들고 힘에 지쳐 쓰러질 것 같으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그 무엇도 주의 사랑에서 우릴 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이 놀라운 승리로 하루를 더하고 하루를 더한다. 이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이는 나의 능력이 남다르고 특별해서가 아니라, 주가 나를 붙드신다. 주가 나를 도우신다. 주가 나를 강권하신다. 이 힘은 불가항력적으로 나를 이끄신다. 내가 주를 멀리하고 한사코 부인하며 살고자 할 때도 주는 항상 나와 함께 하셨다. 아들 앞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었다. 저도 아는 것이 비록 그 시절, 우리는 힘들고 어려웠으나 또한 그만큼 주가 베푸시는 은혜로 살아왔음을 서로가 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힘에 겨워 상처로 안고 살고 있다 해도, 주는 우리의 그 상처와 노여움으로 찬송이 되게 하셨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 짧은 시편을 음미할 때마다 내가 안고 사는 나의 연약함을 사랑하게 된다. 나의 이 연약함으로 주의 은혜를 더욱 확신하고 감사한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여 바울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나도 나의 약함을 자랑함이니 자식 앞에서 기꺼이 나의 부끄러움으로 주를 찬송한다. 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은혜를 송축한다. 곁에 두시는 ‘아픈 사람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고 더 가까이 있는 ‘힘겨워하는 영혼들’을 위해 주는 오늘도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용하신다. 고달픔과 답답함을 가지고 주 앞에 서게 하신다. 그러할 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영혼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의 상한 심령이 안타까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이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일관되는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의 외침은 깨어 근신하게 하시려고 우리 곁에 바로와 네로와 같은 권세 잡은 자들을 두셨다. 저들을 우리가 존대함은 저들로 우리가 주를 더욱 바람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2).” 그렇게 해서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4).”

 

우린 주가 행하시는 이와 같은 주권으로 산다. 때론 이해가 어렵고 이 길이 너무 모질고 어렵다 해도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어서,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3-34).” 이에 나의 어려움으로 나는 주를 사랑한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 주를 더욱 바란다. 저것들의 소임은 거기까지다. 바로는 바로의 때에 바로의 일을 하였고, 네로는 네로의 때에 네로의 일을 하였다.

 

저들의 결국은 불못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결국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4-15).” 그러니 우리가 저를 존대함은 저들로 우리 영혼은 더욱 주를 바라며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 길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결코 주의 약속은 더딘 게 아니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

 

이를 알 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 또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17).” 내가 오늘 힘쓰고, 삼가야 할 것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함이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

 

하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103:1).

 

분명히 나의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5).

 

그러므로 때론 쓰러지고 넘어져도,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4-15).

 

그럼에도,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0) 2024.06.23
더불어 누림이라  (0) 2024.06.22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0) 2024.06.20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0) 2024.06.19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0) 202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