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전봉석 2024. 10. 10. 00:51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 31:18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2

 

 

부름 받은 자로 사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고 두고 사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하고 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2).” 지명하신 것은 특별한 사명을 위함이다. 저로 성막을 짓게 하심인데, 이에 따른 소명은 오늘 날 나 같은 자로 목사를 세우신 데서도 알 수 있다.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신 데 따른 그 모든 이유와 훈련은 하나의 충성을 위한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하여 내가 남다른 노력으로 이에 뽑힌 자가 아니라, 하나의 지체로 주의 몸을 이루시는 데 쓰임을 받게 하신다.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이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이 작은 일에서 나의 사소한 일상이 곧 주의 일인 것을, 사는 데 따른 이 모든 수고와 애씀이 충성인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하실 때에 나의 은혜에 대하여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나의 부친을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강권하여 붙들어 세우실 때 주가 그의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 일찍이 사업을 하다, 70년대 초 서울이 홍수로 범람하였을 때 부친의 공장들도 모두 물에 잠겨 가재도구하나 건지지 못하고 간신히 다들 몸만 피해 나왔다. 그것으로 빚더미에 올라 죽을 각오로 주 앞에 목 놓아 외칠 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신 말씀이 부친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히는 꿈을 꾸었다. 그런 상황에 뒤늦은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게 된 것이다. 그런 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난하여서 '그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고 산다'는 소릴 할 정도로 사남매의 어린 자식들을 달고도 말도 안 되는 부르심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돌이켜 보면 끼니를 굶은 적이 없다. 어린나이의 나로서는 가난한 시절이었다고 하나 항상 닭고기에 계란이 풍성하였던 것 같다. 부친의 사명은 전투적이었고 모친의 사명은 오로지 주께 다 맡긴 여전사의 삶이었다. 자식들이 어찌되든지 주가 쓰실 것으로 주가 책임지시기를 내어맡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남매 모두 목회자로 이 길을 가고 있으니… 나는 사막 한 가운데 피라미드가 세워진 것보다 오늘 우리 형제들이 모두 주의 사역자로 사는 일이 더 신기하다. 그렇듯 주가 세우신 것은 주가 친히 돌보신다. 이를 또한 개인적으로 나는 확신한다. 나의 일생에 주가 함께 하심이 곧이곧대로 다 믿기지 어려울 정도여서 일일이 열거하는 일조차 모든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았다. 나 역시 뒷걸음치다 그때마다 억지로 붙들려 신학을 할 때면 단 한 번도 내가 학비를 걱정한 적이 없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하심인데 누구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니었던 때가 없다. 그냥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고 모든 게 다 실제로 그러하여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임의로 수고하여 얻어낸 게 하나도 없다. 곧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1-3).”

 

하는 바울의 고백과 그에 따른 인사와 같이 나의 감사와 고백도 그러하다. 이는 주가 세우시고 인정하는 것으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나로서도 나 같은 자가 누구와 견주어 주의 일꾼으로 마땅하다 할 수 있겠나? 싶을 정도 하등에 쓸모없고 하는 게 없는 자인데도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로 나로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마음으로 이처럼 이 부족한 묵상과 글쓰기와 말씀 준비와 누구와의 성경공부를 사랑한다. 아이가 사도행전 몇 구절을 카톡에 올리고 오늘은 아침 7시 40분에 줌으로 만날 것을 남겨두었다. 우선은 이와 같은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성이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1-5).”

 

사도행전은 누가가 쓴 것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진 단체’가 사람들의 단체가 아닌 것을 알게 한다. 당시 모두는 주의 성령으로 모여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소유를 내어놓으며 서로 주의 일에 쓰임받기를 바랐다. 이때 사탄은 ‘고상한 미덕’으로 이를 포장하여 한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인데, 성령의 의도하시는 바를 저는 비틀어서 자신들의 것을 마치 덜어주는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심어준 것이다.

 

위선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파괴하는 것이 위선이고 정치다. 그렇다고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가 받은 형벌은 너무 중한듯하다. 그러나 저들의 중한 죄는 하나님을 능멸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겉치레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이고, 농락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엄히 벌하셨다. 또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의 일부를 절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일이다. 곧 저들 부부의 그릇된 허영심과 남들에게 보이려는 위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 앞서 사람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릇 행하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신앙 안에서 주를 섬기는 일에 그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은 셈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소유를 자신들의 것으로 알고, 그런 가운데 그 정도는 남들보다 많을 것이라 여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만이 문제이다. 그것도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으로 사도들 앞에 내어놓을 때 저들 마음은 찔림이 없었다!

 

동시에 사람을 속이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근본적으로 저들 부부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믿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들의 눈과 사도들의 인정을 더 의식하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실 정도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이는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주를 경외함으로 하는 일이어야 주 앞에 바치는 시간과 물질과 마음이 온전할 수 있다. 이를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계시로 이미 알고 있었다. 저들의 거짓된 미덕과 위선에 대하여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속에 머물만한 자리가 없음을 말이다. 성령을 속인다는 일은 스스로의 믿음을 부정하는 일로 하나님을 조롱하듯 위선자로 사는 것이다.

 

결국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도 저들은 그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거짓말로 속여 얼마를 숨기고 바쳐서 이 끔찍한 형벌을 받은 게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자유의지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돈을 남겨두거나 토지를 팔아 얼마를 숨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된다는 자기 소유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게 문제다. 결국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요즘 같은 시대에 자기의 이익과 주도적인 행복추구권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자신의 권리인양 주장한다면 주 앞에 우리 신앙의 의무는 무색해진다. 더욱이 저들은 집사로서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직책에 대한 사명을 허투루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니니아는 물론 삽비라까지도… 사망의 냄새가 났던 것이어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6-17).”

 

결국 저들 부부의 영적 죽음은 거짓된 입으로 초래한 결과이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4-5).”

 

오늘 말씀에서 이를 나의 소명에도 적용하여서 나는 보잘것없으나 전적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판단과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행여 나의 위선으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한다. 그러할 때,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하는 말씀으로 기도한다. 나는 혼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

 

이와 같이 나의 일상이 별 것 아니나, 아이가 보낸 성경구절을 놓고 풀어서 전해야 할 말씀을 준비한다. 그런 가운데 순서에 따라 오늘의 말씀으로 묵상을 하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주시는 지혜로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를 채워간다. 이것으로 순종을 배우는 일이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나는 아이의 시간에 맞추고, 친구의 시간에 맞출 수 있다. 이 작은 일에 충성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3-25).” 나의 쓰임은 사소하다 해도 필요함으로 주가 사용하심일 테니….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60:5-6).

 

그렇듯 오늘 하루도 나의 사소함으로 주를 바라는 것이어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