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전봉석 2024. 11. 13. 01:10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5:54-55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94:18-19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심은 이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례를 잘 지킴으로 순수한 신앙을 지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규례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안식년과 희년의 휴경(休耕)에 의한 것으로 우리 생각에는 식물이 부족하다거나 일손이 모자랄 것을 걱정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걱정과 염려를 불식시키신다. 곧 제 칠 년, 이때는 안식의 해로 곡물을 심거나 수확하여 저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육 년 때에 수확을 배로 주심으로 안식할 때와 그 다음 해까지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모든 소유와 그 주관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하심을 증거한다. 곧 ‘제 육 년에 얻는 소출이 삼 년을 쓰기에 족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을 기쁨과 풍요 속에 지킬 수 있도록 안식년 전 해 곧 제 6년째의 소출을 평소보다 훨씬 많게 하여 희년까지 3년 동안을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가를 보게 된다. 이에 축복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심을 귀결된다.

 

성경의 복이란 히브리어로 ‘베라크’라 하여, ‘무릎을 끊다’, ‘하나님을 송축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축복, 번성 등을 의미 한다. 곧 물질적인 축복은 물론 영적인 축복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이와 같이 희년의 규례가 명시되던 중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에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레 25:22).” 하심은 희년보다 안식년을 중심으로 곡물의 파종 여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제 팔 년 곧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를 가르킨다. 이 해에도 제 6년에 수확한 묵은 곡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제 8년 가을에 파종한 것을 그 다음 해 7월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 안식년이 희년과 이어지는 안식년이라면, 제 8년째 가을에도 파종이 금지되었으며 제 9년째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파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6년째 수확한 3배의 소출은 제 51년의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던 것이다.

 

이는 곡물의 수확에 따른 것은 물론 사람과 모든 소유에 관한 것으로 확대되어서 ‘희년에 이르러 자유하리니’ 곧 희년 때 종 되었던 자들도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기 기업을 회복할 수 있음을 선언하신다. 희년(禧年)은 축제와 은총의 해로 가난한 자와 압제당한 자들에게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축복의 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희년 제도는 장차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는 곧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참 자유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의미한다. 이는 만물이 회복되고 모든 죄가 사하여지며 참된 자유가 완성되어 성도들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예표 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이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19-21).”

 

그러나 공교롭게도 희년은 지켜지지 않았고 성경에서 누구도 이 해를 지켜 안식하거나 풀어주거나 자유와 축복을 누리게 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한계와 그 불순종의 깊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안식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로서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한다. 7년마다 한 번씩 지키는 안식년과 그것에 일곱 번을 더하여 49년이 되는 희년에 이르러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은 결국 우리로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안식년의 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 116:7).

 

이는 곧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사 28:2-3).” 이로써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우리가 알 때, 다음의 말씀이 우리로 안도하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마치 우리가 주의 팔에 안겨 진정한 쉼을 얻을 때가 오나니 안식일은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주와 함께 하는 평안은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오늘의 주일은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이를 의무로 받을 때는 일이나 권리로 받을 때는 쉼이 된다. 가령 6년 혹은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째 되는 7년의 그 해 안식년은 쉼의 날들이다.

 

의무적으로 지키는 것과 베풀어주신 데 따라 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신앙은 다소 경직되어 어떤 조건에 따른 결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열심을 다하고도 미덥지 않아 다시 더 요구하여 자신을 혹사시키기 일쑤다. 사는 일이 그러해서였을까?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도 안식년은 그렇다 해도 희년의 경우 이를 지키기는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3-14).”

 

이는 결국 이와 같은 규례를 두심으로,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주객이 전도되어 마치 어떤 의무감에 시달려 주를 섬기는 일이 자칫 부여된 일로 여겨져 고단할 따름이라면 이를 제정하신 이의 본뜻과는 다르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곧 우리의 수고함은 진정한 쉼의 소중함을 더욱 크게 한다.

 

하여,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이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 주 앞에 나아와 이와 같은 시간으로 말씀 앞에 앉아 글을 쓰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로 즐겁다. 이 즐거움은 쉼이 되고 안식이 된다. 하루 동안에 늘 긴장하고 있다가 이 시간이 되면 턱을 괴로 앉거나 시선을 오래 두고 한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활개 치며 난다.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어쩌면 우리가 믿는 자로 사는 일에서조차 참 자유를 얻지 못함으로 노심초사 염려와 근심으로 시달리는 게 아닐까?

 

결국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이에,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42-43).”

 

내가 오늘도 없으면서도 풍성하고, 어디가 연약하거나 불완전하여 지치고 쓰러질 때도 주가 아시나니, 내가 주를 아는 것이 아니라 주가 나를 아심으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우린 다만 받은 것으로 풍성하여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7-10).”

 

이 놀라운 내 인생의 역설을 사랑한다. 비록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안 됐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겠으나 또한 그것으로도 주를 사랑할 수 있다는 데서 우리의 영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이는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이는 우리가 알고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주의 충만하신 사랑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기도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하는 일이다. 곧 오늘 나의 누림은 쉴 수 없는 지점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여 오늘도 아이가 보내온 성경구절을 두고, 이따 아침에 아이 출근 전에 나눌 말씀을 먼저 살펴보면서 묵상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9-10).”

 

하신 이 말씀은 앞에 두어 구절을 먼저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

 

이는 결국 “그 행한대로” 갚으심인데, 심판의 기준이 ‘행함’이란 단순한 도식과 함께 우리가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이는 곧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게 없고, 설령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하나님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살피게 된다. 여기서 ‘보응하신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포도세이’라 하여,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 자의 상급이 안 믿는 자의 형벌과 비교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때에 우리로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곧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으로 세상에서의 보람과 성공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곧 우리가 아는 ‘칭의’의 가르침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하는 데서 우리의 불가해한 능력과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 우리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는 진리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는,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그럼 이제 아이의 의문점을 파악해보면, 이와 같은 진리를 모르는 상태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분명히 서로 다른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이는 당연한 일일 텐데, 우리의 ‘환난과 곤고’가 하나님의 ‘노와 분’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환난과 곤고’고 나타날 텐데, 그 순서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하심은 구원이나 은혜가 저들에게 먼저 전하여져 기회가 주어졌듯이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에게 우선적이다.

 

이는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을 거절한 데 대한 형벌도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은 그만큼의 책임 또한 묻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법칙이기도 하여,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시 50:3-6).

 

이에 또한 “영광과 존귀와 평강” 곧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의 평강인데, 이것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런데 이것을 먼저 부여받은 유대인들로 저들은 거절하였고 내팽개쳐버렸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곧 앞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이지 않다. 이미 앞서 저들로 충분히 이해를 주셨다. 여러 차례 저들이 거절하였을 때도 다시 또 참고 기다리시며 회복시키시려 하나님의 열심은 쉼이 없으셨다.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은 증명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으심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그간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특권을 주장할 수 있도 없다. 하나님은 매순간 동일하여 복음을 전하셨다. 이에 누군 순종하였고 누구는 거역하였다.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도,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사울과 다윗의 결우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결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은 다양한 입장을 고려하여 오늘까지 참고 또 기다리신다. 그러할 때에, 이제 우리는 스스로 외친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시 94:1-2).

 

하나님의 공의는 선하시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7).

 

하는 세상에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1).

 

이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