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민 1:53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1-12
출애굽기는 애굽에서부터 시내 산에 도착 후 성막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다. 레위기는 성막 완공 후 시내 산에서 1년간 머물면서 받은 각종 율법의 기록이다. 오늘부터 이어지는 민수기는 시내 산에서부터 가나안 건너편 모압 광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다.
앞서 오늘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의 출발 직전, 곧 출애굽 제 2년 2월 1일에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계수하라 하신다. 인구 조사를 명하시고(1-3), 그 명령을 받들어 조사할 사람들의 명단을 밝히고(4-16), 각 지파마다 파악된 수효를 기록하고(17-34), 그에 따른 인구 총 합계를 설명한다(44-46). 여기서 레위 지파는 예외로 하여 성막 봉사를 위해 구별한다(47-54).
이러한 조사는 광야에서 효율적인 관리와 가나안 정복 때 그 전쟁을 수행할 하나님의 군대를 편성하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에 부름 받은 군사들로 출진한다.
이는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있어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0-12).” 하고 전신갑주를 무장하게 하신 후 우리가 이에 해당하는 전투는 기도인 것을 밝히는 말씀으로 연결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여전히 우린 애굽에서의 ‘노예근성’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산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능동적으로 싸워 나가야 할 군사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와 백성 개개인에게 가지고 계신 관심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인구 조사를 관장할 각 지파의 책임자들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부르시는 데서 알 수 있다 (4-16).
오늘 우리는 영적전투의 삶을 산다. 이는 개별적이면서 실질적이다. 당시 광야 교회로 일컬어지는 언약 공동체를 군대로 개편하여 다룬 민수기는 지상 교회에 부여하신 영적 전술서로 읽힌다. 하나님은 이들을 훈련시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실 것이다. 가나안은 개인적으로 죄 된 속성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차지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을 군대라 부르셨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4).”
후에도,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12:17).”
하심을 통해 앞으로 적들과 싸워 이길 정예군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민 21:3).” 곧 이스라엘은 죄악이 가득한 가나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군대로 그 사명을 받아 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신 7:1-26).
여기서 60만을 헤아리는 병력보다 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을 주목하게 한다. 이를 사도 바울은 혼란 속에 빠진 교회를 향해, ‘승리하는 신앙’을 위해 설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곧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실망하지 않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하면서, 교회에 있어 질서가 필요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3, 40).”
그러할 때 교회가 굳건하여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곧 오늘 당하는 어떤 형편과 사정으로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교회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이와 같은 영적전쟁은 진리로 하나 되어 진리 가운데서 주의 군사로서 그 자세와 조직을 갖추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임할 군사들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면, 오늘에도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군사로 우리를 부르셨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에 우리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에 오늘도 주의 군사로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6-8).”
그리하여,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신앙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런데 점점 사회가 개별화되면서 저마다의 취향과 그 선호가 달라 각자의 이질감을 피해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삶으로 교회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성경은 엄히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즉 우리는 교회로 하나 되어 각각 그 지체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교회의 한 지체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더러는 스스로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회피하고 심지어는 ‘자기들 개인의 신학’을 구축하였고, 나아가 ‘사회신학’으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자국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를 우선하는 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요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공공신학’이란 개념이 실은 ‘시민신학’이라 하여 1960년대에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미국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가장 미국적인 삶’을 위한 제도와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도 않으면서도 거부하지도 않는 범주에서 자국의 신념 체계를 중심으로 신앙을 구축하게 되었다.
시민종교는 1974년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을 접목시켜 ‘공공신학’이라 처음 명명되었고, 몇 년 사이 ‘공적교회’란 명분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사회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와 철학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에 필요한 행동 양식을 제공하는 데 일조를 하며 ‘공공신학을 위함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의 분리의 장벽을 허물고 공동의 사회를 위한 다양한 변이와 전이를 거듭하며 오늘에 다시 또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런 취지의 논문을 읽으며 공적담론으로 성경이 철학과 사회학을 나란히 하여, ‘공공담론의 신학’으로 발전하여 가는데서 성경적이라 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교회와 학문과 사회를 나란히 놓고 그에 따른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비성경적이고 심히 우려할 일이다. 이와 같은 공공신학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혹은 사회참여, 현실참여란 명분으로 교회와 개인을 기반으로 하여 해방신학과 실천신학을 넘나들며 사회 중심적인, 공익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며 발전하고 있다.
조화와 화합, 소통과 윤리를 내세우며 교회가 이와 같은 사회 정화의 자정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의 능력은 그렇듯 온전하지 못하다. 두세 사람만 모이면 권력이 생겨나고, 아젠다가 형성되면서 상대해야 하는 적이 뚜렷해진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대는 혈과 육이 아니라는 성경의 관점으로 볼 때 우리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신뢰할 수 없다. 사람은 개별적으로든지 단체적으로든지 그렇듯 순수하지 못하다. 가령 지금의 여당, 야당할 것 없이 저들은 대부분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불사르며 ‘사회 악’과 맞서 싸운 인물들이다. 소위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축한다고 한 사람들이 오늘의 여러 부조리에 중심이 되고 있다. 저들의 권력 암투는 그대로 우리 인간의 모순과 한계를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능력과 직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사로 부여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이를 알지만 이에 순응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데 있어, 우리 인간은 결국 또 서열이 나뉘고 암투와 모략이 생성된다. 사람, 결국 어쩔 수 없는 죄 된 속성 그대로 씨름하는 존재다. 저마다 의도는 순수할지 몰라도 성경을 떠나고 교회를 등지고는 사람 중심의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인다.
그런 가운데 시민신학이라니! 개인의 종교라니! 그 모든 게 교회를 벗어날 때 이미 오염되고 타락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0, 12).” 우리가 상대할 악은 우리 자신이면서 동시에 사람 중심의 사회다. 두세 사람이 모이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오늘 본문은 개인의 개별적인 독립된 신앙이 아니라, 군대로서 더러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포기하면서 구축해야 하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우리를 세우신 데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더욱 노골적으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하신 말씀에서 우린 어려워진다.
설마 이를 문자적으로 읽고 실제 서로를 미워하여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는,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이뤄가는 데 있어 교회가 중심이 되어, ‘먼저와 나중’의 원리를 바로 따라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에,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다. 성경은 사회나 개인의 이상과 현실을 운운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축하지 않는다. 이미 완성된 성경으로 우리는 자신의 미완을 구축하여 간다. 그러할 때,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6).
그러므로 무슨 신학이니 무슨 종교니, 어떤 화합이니 무슨 참여니 하는 지적허영의 유희 같은 신학이나 종교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오늘의 그럴듯한 인간중심의 사회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다.
이에,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7).
하면 우리로 의롭다 하신 이에 따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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