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4 주일
이사야 23장
두로와 시돈
사 23: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사 23: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사 23: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들어가는 말
바벨론과 두로는 각각 동과 서에 위치하였다. 당시 세계의 두 힘 곧 권력과 재물을 대표한다. 계 18장에서 이들 두 나라는 영적으로 함께 결합되어 있다.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14-18).”
1. 두로
<두로>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베니게)의 주요한 네 성읍 가운데 하나이다. 아라두스, 비블로스, 시돈, 두로는 각각 유명한 항구 도시였다. 그 자매 항구인 <시돈>은 약 40km 북쪽에 위치해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두로는 일찍이 바다를 개척하여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이 활발하였다. 두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때로부터 주전 322년에 이르기까지 약 다섯 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두 번은 앗루르에 의해(느부갓네살), 한 번은 바사에 의해(아타르크세르크스 3세), 그리고 마지막은 마게노냐의 알렉산더에 의해서였다.
이에 오늘 말씀은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2).” 하고 경고하신다. 본문의 예언은 앗수르에 의한 점령이 유력하다. 오늘 12-13절에 “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다시스>는 스페인의 타르테수스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두로의 해상 식민지였다. 다시스를 돌아 고향으로 귀항 중인 선원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두로가 파멸되어 들어갈 항구도, 쉴 집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들려온 곳은 최종 정박지인 <깃딤> 곧 구브로 섬이다. 하여 오늘 1절에서,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하고 외친다.
2. 시돈
<시돈>은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도시이다. ‘상고’는 상인, 장사꾼을 뜻한다. 이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인접한 나라들의 물건을 중개 무역하여 부유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잠잠하라 외치신다.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2).” 이어지는 말씀으로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3).”
이는 시돈 상고로 대표되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이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이들은 고대 세계의 곡창 지대였던 애굽으로부터 곡식을 사서 이것을 ‘큰 물’ 곧 지중해로 운반하여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시흘>은 나일 강을 뜻하는 애굽어 ‘예오르’의 히브리어 발음이다.
오늘 예언에서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4).” 하시는데, ‘바다의 요새’라 불리는 섬과 같은 두로에 임한 재난은 시돈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 땅에도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며 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할 두로가 이제 재난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며 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하였던 두로가 이제 재난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됨으로 이 소식이 애굽에 전해지면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곡물 수출업자들인 그들의 몰락으로 애굽의 경제가 타격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동방 국가들의 침력으로부터 방파제 역할을 해주던 두로의 몰락은 애굽 역시 동일한 군사적 위험에 놓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5).”
※ 오늘날 우리가 세계정세와도 일치한다.
첫째, 곧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지극히 일시적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한때 열국의 시장으로 불리며 부요하였던 ‘바다의 보장’, ‘희락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견고하였던 두로가 황무하게 되어 집도 없고, 어린 자녀들도 없고, 그 거민들이 부끄러워하고 멀리 도피할 것이며, 주위의 나라 사람들도 놀라고 슬퍼할 것이다. 그 헛됨을 알고 그것들을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자는 말하길,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이를 베드로 사도는 더욱 극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하여,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그러므로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둘째,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의 주관자요 섭리하심이 주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리고 있다.
두로의 멸망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두로의 회복도 작정하셨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를 분명히 하심으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하고 우리가 고백할 때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우리 하나님이,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셋째, 이를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두로를 멸망시키신 까닭은 두로가 부요와 영광으로 인하여 교만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들의 영광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결국 오늘 우리가 살면서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때, 당시 해상 무역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치부하였던 두로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 사실 두로에 대한 심판의 예언에 이어, 70년 후에 찾아올 두로의 회복에 대해서도 예언하셨다.
오늘 17절,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런데 또 어떠한가?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18).” 결국 저들은 저들의 결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두로의 멸망은 피할 길이 없었다.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13).”
두로는 다윗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국가이다. 그럼에도 극심한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나라였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도 암암리에 그 영향을 받았다.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왕상 5:6).” 곧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저들의 물자와 기술을 받아들였다. 두로와의 무역으로 저들의 부정과 부패까지 심지어는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가 스며들어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였다.
나오는 말
이와 같은 특징으로 다시 본문을 살필 때, 전반부의 두로에 대한 심판의 예언(1-14)과 두로를 다시 회복시키시는데도 저들이 멸망하게 되는 것은 교만과 타락이라 기록하고 있다(15-18). 이로써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참고 또 기회를 주시는데, 세상의 부정과 타락과 우상숭배는 어쩔 수 없다. 끝내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은 멸망의 심판이 이르게 됨을 알게 하신다.
이상과 같이 부의 축적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세상에서 곧 오늘의 우리 ‘두로와 시돈’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인정하게 된다. 바울은 이로써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하며 자족하는 비결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결국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자본주의의 특성상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하는데, 물질만능주의란 점점 더 생존의 문제보다 개인적 취향과 기호, 즐거움으로 인해 끝도 없이 가져도 만족함이 없다. 그리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두로와 시돈은 멸망할 것이다.
이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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