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0 주일
이사야 22장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
사 22:1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사 22:2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사 22:3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사 22: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들어가는 말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 볼 때 남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 남서쪽으로는 힌놈 골짜기로 둘러 싸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하시는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이다. 앞서 주변국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다, 갑자기 언약의 당사자인 ‘다윗의 집’과 유다를 향한 심판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유다를 향한 심판 예언은 주변국에 대한 말씀(14:28-17장)이 앞서고 이에 구스와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에 대한 예언(18-21장)으로 이어진 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관심은 유다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늘 전개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주전 701년경, 왕하 18장에 나타나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많은 공물을 요구하던 때였다. 그는 유다로부터 조공을 약속받고 잠시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다시 군사적 위협을 해왔다. 이러한 위협(36, 37장) 속에서 선포된 예언이다. 실제 앗수르와 그 연합군의 침입이 예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유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예언의 경고이다.
하나님은 예언된 심판을 철회하시기도 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신다. 가령 요나를 통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심판을 경고하였을 때도 저들이 회개하자 그때의 심판을 미루신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의 이 예언도 당장에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폐기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불신과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장차 바벨론에 의한 더 큰 심판을 내리셨다.
본문이해
오늘 본문은 1) 결박당한 예루살렘의 거민들(1-4). 2)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거민들(5-14). (3)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차례로 진술되고 있다(15-25). 결국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만할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 회개하지 않으면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특히 지도자들 곧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에 의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1. 교만의 결과(1-4)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1).”
주변국의 심판을 예언하던 이사야는 이제 예루살렘의 교만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멸망을 선언한다. 예루살렘의 임박한 진노를 예언하는데, 저들은 오히려 스스로의 자신감으로 당장 초래될 전쟁에 대해 자아도취에 빠져, “지붕에 올라갔다.” 지붕에 올라갔다는 것은 아마도 퇴각하는 산헤립의 군대를 지켜보기 위함이었을 텐데, 당시 산헤립은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양의 공물을 받고 그에 따라서 군대를 철수시킨 것이다(왕하 18:14-16).
그런데도 저들은 좋다고, 마치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과 지혜로 전쟁을 극복한 것처럼 자축하듯 떠들고 소란을 떠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강대국 사이에서 저들의 요구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때마다 방위비 분담금(현재 매년 1조 5천억을 지출하고 있고, 새로 출범한 트럼프 정책은 이것보다 9배의 돈을 더 요구하는 것을 상기하면서)이나 엄청난 물량의 무기들을 사들이면서 스스로는 국방을 안위하며 자신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2).”
이러한 교만은 급기야 멸망과 수치로 드러날 것이다. 성경은 무엇보다 교만을 심히 경계하신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시 119:21).” 성경은 일관되게,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이들은 결국 교만하여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 된 것과 이를 인정하며 회개함으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오늘 우린 이에 따른 말씀의 경고를 듣는다. 결국 저들은 교만으로 유다의 관원들과 거민들이 결박당하여 끌려간다.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3).”
이러한 비참한 광경은 선지자 이사야를 슬피 통곡하게 만들었다. 이사야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저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의 결국은 죄의 심각성을 훗날에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고 망한 뒤에야 절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4).”
2. 회개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5-14)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5).”
예루살렘이 아무리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준비는 허사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우리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는 없다. 오늘 본문을 이를 밝히면서 적군의 공격을 나름은 준비한다고 하는데(5-7), 유다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8-11), 결국은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최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준다(12-14).
곧 예루살렘을 치러 온 앗수르군에 엘람인과 기르인도 있었다. 그들은 각각 활, 전통, 방패로 무장했다. 병거와 마병까지 있었다. 그들은 공격 준비를 다 끝내고 도열해 있다. 병거는 온 골짜기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았고 마병도 성문 앞에 장엄하게 정렬해 있었다(5-7). 이에 저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결국은 성벽이 무너지고, 거민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칠 정도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11).” 그렇게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고 나태하다(8-11).
그들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지혜와 임기웅변으로 현실을 모면하려 했다. 저들은 회개하지 않는고(12-14),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결과로 “통곡하고 울며 머리털을 뜯고 굵은 베를 띠”는 현실을 맞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반항의 뜻을 담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12, 13).”
이에 대하여 바울은 후대에 정의하기를,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렇게 우린 우리가 받을 심판을 스스로 쌓으며 살아가고 있다.
3. 관리들의 문제(15-25)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19-21).”
이러한 때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데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탐욕적인 지도자 ‘셉나’에 대한 개인적인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당시 서기관 셉나는 ‘협상의 책임’을 담당하였다.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사 36:3).”
그런 그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한다는 게 유다 왕이 묻혀 있는 산 위에 자신들의 묘를 팠다.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16).” 여기서 대표적으로 ‘셉나’를 향한 질책은 그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수레와 함께 영광을 돋보이게 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수치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18).”
셉나와 앗수르 왕 산헤립과의 협상에 참가했던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오늘 본문에서는 상대적으로 ‘내 종’이라 부르고 계신다.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0, 21).” 이에 덧붙여, 다윗의 집 열쇠를 주어 결정권을 주었다고 하신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2).”
이를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을 위시하여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책무와 그 의미가 얼마나 막중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이 약속은 얼마나 견고한지를, ‘잘 박힌 못’ 같다고 하고 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23).” 그러나 엘리아김은 후손과 친척들에 의해 그 영광에서 탈락하게 된다(24). 곧 가족들과 친척들이 그와 같은 권세를 등에 업고 교만에 빠진 것이다. 오늘 날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면 이해가 간다.
나오는 말
이어서 이와 같은 부정적 묘사는 신실했던 엘리아김도 타락하고, 유다의 총체적 부패로 이어져 모두를 난감하게 한다. 결국 권력과 권세는 더욱 더 겸손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감당하지 않으면, 자신은 눈멀고 영달에 사로잡힌 셉나와 가적들의 족벌정치를 야기시킨 엘리아김의 최후로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될 때까지 이를 심각하게 받아내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각 권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할 때,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교만하여져 주변을 살필 능력을 상실한다. 그에 따른 비극적인 현실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 된다.
결론은 회개다. 교만의 최후는 패망이다. 관리들의 부패는 백성들을 고통에 처하게 한다. ‘내 종’이라 불리었던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도 결국은 ‘다윗의 집 열쇠’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손과 친척들에 의한 그 영광이 박탈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권자시다. 우리는 교만하여 자신이 힘쓰면서 하나님을 저버릴 때, 가옥을 허물고, 성벽은 무너진다. 회개할 수 있을 때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때에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게 될 것이다(12). 그런데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 식으로 막돼먹은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교만에 응당한 징계와 멸망을 멈추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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